리아 토머스가 지난 3월18일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주최 수영대회에서 경기를 마친 뒤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애틀랜타/AP 연합뉴스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ㅣ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스포츠에서 성별은 늘 중요했다. 고대 올림픽은 여성의 출전과 관람까지 금지했다. 성별은 검열 대상이었다. 1896년부터 열린 근대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은 여자가 땀 흘리는 건 아름답지 않다며 출전을 막았고, 큰 반발을 접하고서야 여성도 출전할 수 있는 종목을 늘렸다. 냉전 시대에 성별은 더 민감한 주제였다. 올림픽이 국가 간 자존심 경쟁의 장이 되면서 이기기 위해 남자를 몰래 여자 경기에 출전시킬지 모른다는 의심이 등장했다.
1950년부터 여자 선수의 벗은 몸을 의사가 직접 검사하는 제도가 생겼다. 1967년에 염색체 검사로 바뀌긴 했지만 모욕은 여전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땄던 폴란드의 에바 크워부코프스카는 1967년의 검사에선 성염색체가 XX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여자가 아니라며 그간 세운 신기록들은 말소되고 선수 생활도 끝났다. 하지만 이후 에바는 자녀를 출산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Y염색체가 있어도 난소와 자궁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몸을 배제했던 엉터리 염색체 검사법은 1999년에야 폐지되었다. 2000년대엔 호르몬으로 기준이 바뀌었다. 스포츠 단체가 성별 판단을 하지 않고, 여자 경기 출전 자격을 체내 테스토스테론의 일정한 수치로 정하는 제도다. 남자는 여자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가 있기에 남자 경기엔 출전 제한 조건이 없다. 여자들끼리만 뛰도록 보호하면 된다.
올해 3월에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주최 수영대회에서 리아 토머스라는 스물두살의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가 500야드 자유형에서 1등을 했다. 선수 자격 조건에 충분히 부합했지만 출전을 금지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몸이 만들어지는 성장기를 남성으로 지냈으므로 호르몬 수치가 아무리 낮아도 신체 조건이 생물학적 여성에 비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이젠 청소년기를 어떤 성별로 보냈느냐가 판단 기준이 되었다. 게다가 남자 선수로 별 볼 일 없으니까 승승장구하기 위해 여자 경기로 옮겼다는 의심과 공격도 나왔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리아는 2018년 2월에 아이비리그 챔피언십에 처음 출전해 1000야드 자유형에서 6위를 했고, 2019년 2월엔 500야드, 1000야드, 1650야드의 자유형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한 유망주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점점 깊어져 수영장에서 공황 발작까지 겪자 코치에게 커밍아웃할 용기를 냈다. 2019년 5월부터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열린 대회엔 여자 수영복을 입은 채 남자 경기에 출전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호르몬 치료를 1년 이상 해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 했다. 이때 200야드 자유형에서 554위에 머물렀는데, 바로 이 성적과 지난 3월의 성적을 비교하며 남자로 빛을 못 볼 거 같으니 여자 경기로 넘어왔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이전 기록까지 본다면 리아 토머스는 그저 수영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트랜스젠더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스포츠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같은 논리로 미국의 몇몇 주엔 트랜스젠더 청소년은 여자 선수로 뛸 수 없도록 금지하는 조례가 이미 제정되었다. 공정함은 중요한 가치다.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시스젠더는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면 스포츠 선수가 될 수 있는데 트랜스젠더 여성만 아무리 원해도 스포츠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이 불공정은 어떻게 해결할까? 아직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스포츠 선수가 없는 한국에선 너무 이른 걱정일까. 유명 정치인이 선량한 시민을 지키려는 것일 뿐이라며 장애인 혐오를 조장하는 작금의 현실을 보니 아니다.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장애인은 지하철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시민이 될 수 없고, 트랜스젠더는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지키고 보호한 것이 정말 ‘공정’이,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이 맞긴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