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그 관계를 매개하지만, 사실 매체 자신이 사람과 즉각적으로 밀착함으로써 사람 사이를 떼어 놓는다. 곧 인간과 비매개적인 관계를 구조화한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미디어가 아니다.
김용석 | 철학자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걸 원치 않는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좀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비행기 추락 사고로 ‘영원한 실종’의 삶을 살고 있는 작가의 유언 같아서 귀담아듣는다.
성실히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왕자에게 제발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한다.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왕자에게 여우는 답한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그러고는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하는 건지 일러준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거든. …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아무 간격 없이 바로 옆에 앉게 되면 길들이기는 완성된다.
이 완성의 단계가 뜻하는 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매체(media)도 끼어들거나 매개하지(mediate) 않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immediate) 관계이다. 여우는 언어의 사용조차 거부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곧 둘 사이에서 미디어가 될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제한다.
이 대목은 생텍쥐페리가 간절히 바라는 인간적 소통의 진의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그가 <인간의 대지>에서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야간 비행 도중 지상에서 발견되는 등불을 보고 독백한다. “진정으로 합류하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저 벌판에 멀찍이 타는 저 등불 가운데 어떤 것과도 소통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순수하고 단순하지 않다. 여우와 왕자의 이야기는 ‘관계와 소통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물론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이는 생텍쥐페리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쳐온 책이라는 인쇄 미디어를 여러 권 생산했으니까 말이다. 자신이 제공하는 미디어를 건성으로 다루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상은 소중하다. 우리가 매일 만들어내는 현실이 ‘막 나가지’ 않도록 해주는 성찰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세계의 현실을 신랄한 비평의 쟁기로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던 작가는 마셜 매클루언이다. 그는 1951년에 <기계 신부>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지만, 미디어 비평의 토대를 닦은 책으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1962년에 발간한 <구텐베르크 은하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바로 생텍쥐페리가 소중히 여기는 인쇄 미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실체’를 밝히려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책 발간 60주년이다. 1911년생인 매클루언이 살아 있다면 만 111살이 되는 해이다. 종종 숫자는 흥미로운 상징성을 지닌다. 이 미신 같은 사족을 다는 이유는 매클루언의 책들이 세월의 흐름에도 미디어 이론과 비평에서 아직 퍼덕이는 생선과 같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다. 매클루언의 저작들은 생텍쥐페리의 조언대로 충분히 성실하게 다시 읽어볼 만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인쇄 미디어 비평이라는 각론을 넘어 미디어 비평의 원론적인 토대였다. 미디어를 포함한 도구가 인간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는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도구의 철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곧 도구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첩경임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밝히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는 “우리는 도구를 만든다. 그다음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라는 말에도 담겨 있다.
매클루언은 이런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다음 저술을 예고했는데, 그 책이 바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년)이다. 저자의 의도는 책의 뒷부분에 담겨 있다. 그는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확장”이다. “기계 시대 동안 우리 서구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공간적으로 확장해왔다. 전기 기술 시대에 접어들고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다른 행성들은 몰라도 최소한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거하며 중추신경 조직 자체를 전 지구적 규모로 확장해왔다.” 이는 매클루언 특유의 개념과 어법으로 교통망이나 정보통신망 등을 인간 중추신경 조직의 연장이나 확장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이 확장한 미디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외부적 확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속적이고 과다한 확장은 일종의 ‘되먹임’ 현상을 가져온다. “미디어가 인간 내부에까지 확장되어” 있으며 “수적으로는 전체 인류에까지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클루언의 사상은 오히려 그의 책 제목을 뒤집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이해: 미디어의 확장’이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널리 회자되어온 매클루언의 아포리즘을 이해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사전적 정의처럼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용기가 아니라, 그 작동 구조 자체가 인간 삶에 메시지처럼 침투해서 사회·문화의 개념적 틀을 결정짓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미디어는 마사지다.” 나아가 미디어는 인간 두뇌의 특정 부분에 마사지를 가하는 구실을 함으로써 특정한 지각 방식을 강화하고 그에 따라 특정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갖도록 유도한다는 뜻이다.
매클루언은 역설적으로 매체의 ‘비매개적’ 성격을 주장해온 것이다. 매체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그 관계를 매개하지만, 사실 매체 자신이 사람과 즉각적으로 밀착함으로써 사람 사이를 떼어 놓는다. 곧 인간과 비매개적인 관계를 구조화한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미디어가 아니다. 아니 ‘A≠A’라고 하는 것은 수학 등식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말을 만들어 표현해야겠다. 미디어는 임미디어(immedia)다. 이 역설이 현대 미디어의 이중성이고 권력이며 실체다. 매클루언은 이 실체를 응시하라고 했다. “소용돌이치는 주마등의 움직임은 오직 응시로써 정지시켰을 때만이 포착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포착은 늘 그렇고 그런 통상적인 참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책 제목의 반어적인 의도에 대해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만화경이다.” 미디어 만능의 시대, 아주 가끔이라도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가까이 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만화경 속에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