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버니바 부시(1890~1974)
“재단사처럼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뱃사람처럼 욕을 하는 인물이었다.” 사피 바칼이 쓴 <룬샷>이라는 책에는 버니바 부시가 썩 멋있게 나온다. 1940년 6월에 한 페이지도 채우지 않은 짧은 기획서를 들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만났다. 회의는 10분 만에 끝났다. 부시는 정부와 과학계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새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버니바 부시는 미국 군대가 혁신에 실패하고 위기에 놓인 때에 등판했다.” 2차 대전 때 부시의 조직은 마이크로파 레이더를 실전에 배치해 독일 잠수함 부대를 물리쳤고 항생제와 혈장 수혈을 연구해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원자폭탄도 만들었다. 이 일의 적임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는데, 좌익 전력이 있다며 군부가 그를 꺼렸다. 부시는 군을 설득해 오펜하이머를 책임자로 앉혔다.
“비밀 과학자 부대의 장군.” 1944년에 <타임>은 부시를 이렇게 소개했다. 1945년에 부시는 ‘과학: 그 끝없는 전선’이라는 글을 썼다. 나라 곳간을 열어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면 국방뿐 아니라 보통사람의 삶도 윤택해진다는 내용이었다.
<룬샷>에는 이 무렵의 이야기까지 실렸다.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 2차 대전이 끝나자 냉전이 시작했다. 카이 버드의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따르면, 부시와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을 개발하려는 정부 정책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부시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입을 열었다.” 반공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망신 주는 청문회를 열었다. 해묵은 좌익 전력을 다시 끄집어냈다.
1954년 4월에 그도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오펜하이머처럼 자기 의견을 밝히는 것이 문제라면) 나부터 재판정에 세우십시오. 이런 이유로 한 사람에게 오명을 씌운다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신 있는 발언이었다. 부시가 만든 신무기보다 부시가 청문회장에서 한 말이 나는 더 좋다. 냉전 시대를 지나며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남은 업적이 있다. 인터넷 세상에 쓰이는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은 그가 만든 메멕스라는 기계에서 왔다고 한다. 버니바 부시가 태어난 날이 1890년 3월11일이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