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이상헌의 바깥길] 투표하러 가는 길

등록 2022-03-08 18:05수정 2022-03-09 13:54

찬 바람을 뚫고 차는 잘도 달린다. 작은 마을들을 연이어 지나간다. 어딘가에 눈이 쌓여 있고 또 어딘가는 겨울 그림자에 갇혀 있었는데, 지나간 것들은 더이상 내 눈에 남아 있지 않다. 목적지까지 몇 킬로미터 남았는지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는 이제 시내에 들어선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멀리 떠나서 살면, 투표장으로 가는 길도 멀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언저리에 있는 집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야 투표소가 설치된 대사관에 도착한다. 새벽부터 서두른다. 아내는 소풍길에 나서는 것처럼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고, 강아지는 그 옆에서 닭살 하나 얻어먹을 요량으로 낑낑댄다. 표를 던지는 ‘찬란한 일초’를 위한 준비치고는 부산스럽다.

가는 길은 왜 이렇게 추운가. 바깥 공기는 날카롭게 얼어붙었고, 알고 보니 자동차 난방장치는 고장 났다. 차 안에 찬 바람 가득하다. 마침 계기판에는 “냉각장치 수리 요망”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안팎으로 고장 난 것투성이다. 고쳐야 하는데, 나는 투덜대기만 한다. 아내에게는 냉각장치가 아니라 계기판이 고장 났을 것이라며 우겨본다.

링컨 대통령이 그랬던가.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고. 모두가 믿고 싶어 하는 맞는 말인데, 나는 오늘 이 말이 마뜩잖다. 투표가 총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투표로 이긴 쪽은 총자루를 쥔 사람처럼 휘젓고 다니고, 진 쪽은 총알받이라도 된 양 눈치 보기 바쁘다. 이렇게 되면, ‘존경하는 유권자’는 이런 격투가 벌어지는 링 밖에서 바라볼 뿐이다. 제 삶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면서도 고함지르고 때로는 멱살도 잡지만, 결국은 ‘구경꾼’ 신세다. 결국 나의 한 표는 너를 위한 ‘총알’이다. 그래서 맬컴 엑스는 “투표는 곧 총알”이고, 그 총알은 나를 위한 총알이어야 한다고 했다. 표적이 정확히 보이면 투표하고, 표적이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으면 투표용지를 주머니에 넣어두라고 했다. 나는 표적이 보이지 않는데 투표하러 간다.

아내가 슬그머니 묻는다. 누굴 찍을 거냐고. 부러 목소리를 높여 아무리 살가운 부부 사이라도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지난번 선거에는 아내와 의기투합하여 ‘투표 공조’를 했다. 지금은 나도 모르겠으니, 공조할 것도 없다. 사실 마음은 정했으나 그 정한 마음에 자신이 없는 탓에, 스스로 “나는 모른다”고 되뇌고 있다. 아내는 ‘치이’ 하며 ‘니 잘났다’는 표정이다. 마침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스며들었고, 차 안이 쪼금 따뜻해졌다. 다행이다.

나는 왜 자신이 없을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거가 ‘말잔치’이기는 하지만, 내가 딴에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현안에 대해 빈말조차 듣지 못한다면 당최 무얼 기준으로 ‘총알처럼’ 표를 쏠 건지 난감해진다. 표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번에 ‘더러운 일’에 대해 그다지 듣지 못했다. 에얄 프레스의 다소 신랄한 정의에 따르자면, ‘더러운 일’은 ‘착한 사람’들이 그 사회적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명시적으로 그것과 관련되고 싶어 하지 않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떠맡긴 일을 말한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우리가 ‘착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고 문제가 생기면 놀라는 표정만 잠시 짓고 곧바로 모른 척하면 되는 종류의 일이다.

프레스는 더러운 일의 대표적 예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가축을 도축하는 미국의 이민노동자를 들었지만, 한국으로 오면 더러운 일은 무엇보다도 위험하다.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다. 마치 더러운 일을 하는 용병 같다. 착한 사람들은 죽음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최선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들이 택한 방식은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즉 위험의 분배를 바꾸어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온전히 그 위험을 떠맡도록 한다. 그 그룹의 이름은 명징하게도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일터의 바깥에 있다가, 죽을 때만 한가운데에 들어온다. 착한 사람들이 목소리 높인 선거였기 때문일까. 온갖 나와 남의 더러운 사생활을 내놓고 따지면서도, 이렇게 ‘더럽게도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사회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도 잊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회라는 몸뚱이를 수술대에 올렸다. 그동안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동맥과 정맥이 드러났다. 착한 사람의 잘난 얼굴과 빛나는 몸매를 유지하게 하려면 ‘필수 노동자’가 복잡하게 얽힌 핏줄 속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 그간 모질게 감추었던 그들의 값싼 땀, 눈물, 희생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막 학교를 졸업한 앳된 청년도 있고, 갓 결혼한 발그레한 남편도 있고, 이 나이에 일하는 것만도 고맙다며 손사래 치는 할머니도 있다. 착한 사람이 집에 갇혀서도 우아한 삶을 누릴 때는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더니, 이들을 어떻게 ‘영웅’ 대접할지를 따져야 할 선거판에서는 정작 말이 없다.

사회적으로 ‘필수적’이라는 노동을 어떻게 보상할지에 대해 다들 아이들처럼 옹알거리기만 하니, 당연히 최저임금 얘기도 없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6월에 최저임금 결정에 맞닥뜨릴 텐데, 다들 조용하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사정까지 고려해서 면밀한 고민과 작전이 필요한 순간에 선거의 눈은 다른 쪽으로만 향해 있다. 최저임금이 다시 한번 ‘을’ 간의 감정싸움이 되도록 내버려둔다. 이 역시 ‘착한 사람’의 방식이긴 하다.

20대 대통령선거 재외투표 첫날인 지난달 23일(현지시각) 오후 프랑스 파리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인들이 투표하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20대 대통령선거 재외투표 첫날인 지난달 23일(현지시각) 오후 프랑스 파리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인들이 투표하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찬 바람을 뚫고 차는 잘도 달린다. 작은 마을들을 연이어 지나간다. 어딘가에 눈이 쌓여 있고 또 어딘가는 겨울 그림자에 갇혀 있었는데, 지나간 것들은 더이상 내 눈에 남아 있지 않다. 목적지까지 몇 킬로미터 남았는지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달려온 선거판에서도 출렁이던 여론조사 숫자만 바라보다가,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잊혔을까. 그래도 한때는 그랬지 않았나. 늘 잊히는 사람들이지만, 선거판이 열리면 갑자기 소환되기라도 했다. 이번에는 그마저도 없다. 착한 사람은 더이상 착한 척도 하지 않는 걸까. 사회적 망각이 체계화되면, 사회적 배제는 제도적 정당화의 길로 들어선다.

차는 이제 시내에 들어선다. 어쩌겠나. 나도 착한 사람이다. 나의 차도 착하다. 그런 ‘착한’ 차는 추웠다. 제 몸은 엔진의 열기로 용광로처럼 타올랐지만, 그 따뜻함을 좀체 내게 나누어주질 않았다. 제 몸만 뜨거우면 그만이라는 듯 달렸다. 착한 사람도 고장이고, 착한 차도 고장이다. 오늘, 모든 ‘착함’은 고장이다.

자, 이제 누굴 찍을 것인가. 새벽부터 차에 갇혀 잔뜩 짜증이 난 강아지에게 물어봤다. 사람이 개 같은 소리를 한다며 짖는다. 주인이 개에게 왜 갈 길을 묻느냐는 표정이다. 머쓱해져서 투표장에 들어선다. 투표장 직원이 ‘착하게’ 나를 투표장으로 안내해준다. 문득 옆을 본다. 문 옆으로 낮게 선 자그마한 나무에서 조그마한 꽃봉오리 하나 몰래 피어난다. 그래, 내 표 하나는 네게 주련다. 이러나저러나, 봄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미 예견됐던 ‘채식주의자’ 폐기 [한겨레 프리즘] 1.

이미 예견됐던 ‘채식주의자’ 폐기 [한겨레 프리즘]

이대로면 식물 대통령, 자진사퇴, 탄핵뿐이다 2.

이대로면 식물 대통령, 자진사퇴, 탄핵뿐이다

[사설] 임기 절반도 안 돼 최저 지지율 19%, 이 상태로 국정운영 가능한가 3.

[사설] 임기 절반도 안 돼 최저 지지율 19%, 이 상태로 국정운영 가능한가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4.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밥 먹듯 거짓말’ 윤 대통령 공천개입 의혹…특검밖에 답 없다 5.

‘밥 먹듯 거짓말’ 윤 대통령 공천개입 의혹…특검밖에 답 없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