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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생애사 프로젝트

등록 2022-03-01 18:05수정 2022-03-02 02:31

생애사 작업은 한 개인을 만나면서 동시에 한 시대를 만나는 일이고,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개인의 생은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일상은 치밀하게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내가 일하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글쓰기 수업에는 ‘생애사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책 한권으로 엮는 작업이다. 2학기가 되면 학생들은 한·일 고대사나 고려인들 이야기, 하와이 이민사 등을 본격 학습하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정에서 당찬 포부를 안고 태평양을 건넜던 사진 신부나 시베리아 대륙 횡단열차에 태워져 카자흐스탄 불모의 땅에 버려졌던 사람들의 서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각자의 집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생애사 프로젝트의 과정이다. 묻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 잔소리쟁이 할머니나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할아버지의 생애 역시 도저한 대하소설이요 파란만장한 드라마다. 날 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던 그녀에게 두연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물어볼 때, 날 때부터 할아버지가 아니었던 그에게 당신의 첫사랑은 누구였나요 물어볼 때, 그곳에 한 남자 혹은 한 여자가 있음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장롱의 언어, 소파의 말만큼이나 생경하고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미끄덩 들어서는 순간 만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에서 시작된 내 꿈의 근간, 기질과 성향의 발뿌리, 오랜 시간 공들여 연마되어온 재능, 전승되고 전승되고 전승되어 마침내 내 몸으로 집결된 그 오랜 세월의 절차탁마.

생애사 프로젝트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1928년에 태어났다’가 아니라 ‘한성구는 1928년에 태어났다’라고 쓰는 것. 이는 글의 주인공과 작가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낯설게 하기를 실행하기 위함이다. 두번째는 그녀 혹은 그에게도 빛나는 청춘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 지금은 주름진 얼굴로 오도카니 앉아 있지만 그녀도 한 시절 두근두근 설렘 많은 소녀였음을, 쿨럭쿨럭 해소 기침을 하는 구부정한 저 노인도 한 시절 패기 넘치던 청년이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생애사 작업의 관건이다. 또 하나는 주변인 인터뷰. 본인의 기억과 주변인의 기억은 때로 어긋나고 충돌하고 갈등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퍼즐 맞추듯 정교하게 엮어내면서 기록자는 비로소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연대기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개인의 서사와 공적인 역사가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를 꼼꼼히 비교하다 보면 책에서나 보던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생애사 프로젝트의 과정은 질문지를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질문은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터뷰에는 흐름이 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데면데면하지만 문고리를 여는 질문 하나가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이야기의 신명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사랑받았던 기억이나 동네 친구들과의 장난질 따위가 물꼬를 트기도 하므로 유년의 추억을 이끌어내는 질문은 생애사에서 매우 요긴하다. 가지에 가지를 치는 질문지는 그 자체로 생애사의 가장 중요한 밑그림이며 지도가 된다.

질문지가 완성되면 본격 인터뷰를 실행한다. 실제 인터뷰에서 명심할 건 언어만이 인터뷰가 아니라는 점이다. 표정, 말과 말 사이의 거리, 망설임, 틈, 응시, 이런 것들을 통해 드러내려 하는 것과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의 미묘한 상충까지 읽어낸다면 아주 훌륭한 인터뷰어가 될 수 있다.

서너번에 걸친 본인 인터뷰를 마치면 주변인 인터뷰를 한다. 주변인은 가능하면 다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다. 배우자, 친구,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형제, 시누이, 올케, 동서 등등. 이들의 이야기도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사진이나 물건들을 챙기는 것이다. 젊어서의 사진이나 주고받은 편지, 일기 따위가 있다면 반드시 챙겨두어야 한다.

주변인 인터뷰까지 마치면 구성을 시작한다. 긴 글은 구성이 막중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 사람의 생애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구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해야 한다. 연대기순의 구성은 쓰기는 쉽지만 가독력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구성을 마치면 본격 글쓰기 작업을 시작한다. 원고가 마감되면 책 디자인을 한다. 그림과 사진과 이미지들을 활용해 한 사람의 생애가 잘 보일 수 있도록 편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완성한다.

생애사 프로젝트를 하면서 우리가 마주친 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역사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생애사 작업은 한 개인을 만나면서 동시에 한 시대를 만나는 일이고,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곳의 이야기이면서 저곳의 이야기이고, 남성의 이야기인 듯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개인의 생은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일상은 치밀하게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보도연맹,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쟁, 역사 교과서에서나 마주쳤던 이야기가 놀랍게도 학생들의 글 속에 등장했다. 1930년대 신소설에서 읽었던 듯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것과 할아버지를 인터뷰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할아버지들의 말하기가 직선적이라면 할머니들의 말하기는 나선형이었다.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개입할 틈이 적은 반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해석과 재구성의 여지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부모가 동시에 조부모의 자식이었으며 그들 또한 만만치 않은 사연을 가지고 성장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생애사 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가족의 역사에 대해 이해했다면 교사들은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증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므로 4대에 걸친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이 학생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기적이 필요했는지, 4대에 걸친 꿈과 희망이 응결된 결정이 지금 여기 있는 거구나, 말썽쟁이 지각쟁이들도 그지없이 중하고 귀하게 여겨졌다. 해마다 쌓인 생애사 원고들이 빅데이터가 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다.

1918년생 도주씨가 했던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육촌동서쯤 되는 사람이 시집살이가 하도 힘들어 에라이 모르겠다 죽든 살든 일본으로 내빼자 하고는 밤보따리를 싸 사흘 밤낮을 걸어 마침내 불빛이 휘황찬란한 대도시에 도착을 했다. 드디어 일본이로세,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살 생각에 육촌동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데, 사람들이 모두 조선말을 하더란다. 그곳은 경상남도 진주였던 것이다.(<이도주전> 중, 김오이 학생의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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