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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바의 파괴, 브라마의 창조

등록 2022-02-17 18:27수정 2022-02-18 02:32

전명윤
환상타파

2006년 인도의 기차 안.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라 장거리 기차를 탈 때는 노상 잡지 몇 권을 사서 읽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시절. 맞은편의 한 인도인이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외국인이 <프런트라인>을 읽는 건 처음 보는구먼.”

<프런트라인>은 첸나이의 좌파 언론인 <더 힌두>가 발행하는 자매지 중 하나로 인도 매체 중 가장 왼쪽에 있다. <프런트라인>은 매대에 흔치 않기 때문에 ‘굳이’ 찾아봐야 한다. 그는 그게 신기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그는 인도에서 꽤 유명한 좌파 정치학자이자, 듣기에 어떨지 모르지만 마오이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22시간짜리 기차에서 우리는 6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었다. 한국은 인도의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리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사실 중국을 가보니 혁명은 영 실패한 거 같더라는 내 이야기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내 이력이 일단 그에게 호감을 산 것 같았고, 어쨌건 실제 눈으로 본 바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는 그럼에도 인도의 현실에서 왜 부족민들이 마오이스트 반군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파했다. 우리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2014년 인도에선 총선거가 있었고, 리버럴 좌파라 할 수 있는 국민회의에서 극우파라 볼 수 있는 인도국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는 인도국민당을 찍었다고 했다. 살면서 진심으로 크게 놀란 적이 몇 번 없는데 이때는 뭔가 잠깐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인도 내 공산 반군에 대해서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내던 그였기에 이유가 궁금했다.

“별거 없어. 혁명의 배신자들은 혁명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처단되어야지.” 그는 정말 강렬한 단어를 취사선택해 서슬 퍼런 선언을 하듯 말했다. 그건 더이상 묻지 말란 의도였다. 그도 사실은 속상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 생의 이번 전투는 완전 헛것이 되었어. 힌두교도들 말처럼 윤회해서 나도 다시 시작해야지.” 그는 시바신처럼 자기가 만든 세계를 파괴해버렸다. 어쩌면 파괴가 이루어져야 탄생이 존재한다는 지극히 인도인다운 사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혁명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의 하나인 비하르주로 내려가 시민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인도에서 연고가 없는 시골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난 여전히 그를 존경한다.

‘민주화 이후 35년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선거’라는 영국 언론 <선데이 타임스>의 이번 한국 대선 평가를 인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괴로운 요즘, 나는 다시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사이 그가 느낀 절망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 것도 같아. 당신이 왜 그랬는지.”

“난 그들이 변하길 원했어. 평생의 이력이 인도국민당과는 9만8천리쯤 떨어져 있던 사람조차 그렇게 투표하면 반성할 줄 알았지. 그런데 원망만 하더라. 대중이 무지해서, 나 같은 사람이 배신했기 때문에 선거에 졌다고.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했으면 나 같은 사람조차 돌아섰는지 생각해주길 바랐는데 그러질 않더라고. 내 의도는 실패했다고 봐야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건건이 요즘의 한국 상황과 중첩됐기에 혼란스러웠다.

“매번 바꿔. 누구도 연속으로 집권할 수 없게 만들어.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심판될 수 있는 시대라면 차라리 그건 희망적이지. 바뀔 때마다 부패한 상대방에게 칼을 휘두르겠지. 그게 민중에게 어떤 불이익이 되는데?” 그는 다시 파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인도인의 세계관 속에서 파괴와 탄생은 연속되는 하나의 행위다. 세상은 파괴돼야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도 반쯤 인도인이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다. 분명한 건, 나는 3월9일까지 억겁의 선택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야 할 것 같다는 점이다.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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