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레즈비언 커플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는 콘셉트의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레즈비언 할머니’. 이제 50대 초반이니 아직 할머니라고 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내가 레즈비언인 것은 맞으니 언젠가는 나를 수식하는 말이 될 것임엔 틀림없다. 성적 지향을 스스로 인정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험난한 고개를 넘은 덕인지 ‘레즈비언 할머니’란 말이 이젠 좀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성소수자의 나이 듦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성소수자 노인에 관한 외국의 연구보고서부터 살펴봤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문제점은 ‘다시 벽장으로 들어가기’였다. 젊었을 때 가족에게,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당당하게 지냈어도 나이가 들어 부모와 친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땐 정체성을 숨기게 된다는 의미다. 시설의 직원이나 같은 입주자들 중에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편하게 돌봄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늙었으니 대충 살라고? 벽장 속의 삶은 힘들다. 나이가 들수록 남은 날들에 대해선 ‘내가 어서 죽어야지’로 간결하게 압축하고, 지나온 날들은 자랑스럽게, 혹은 한탄을 섞어가며 한없이 늘어놓기 마련 아닌가. 그럴 때 한마디도 할 수 없다면 우울함이 더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목욕을 혼자 할 수도 없고, 생식기나 비뇨기관 쪽의 질환으로 더 빈번히 의료진을 만난다. 이럴 때 자신의 신체가 사람들의 예상에 들어맞는지, 법적 성별에 맞는지는 트랜스젠더 노인에겐 큰 스트레스다. 성전환 수술을 했어도, 법적 성별 정정을 했어도 안 했어도 모두 문제다. 성소수자인 것이 시설의 누구에게까지 밝혀질 것인지, 얼마나 소문이 날지 두렵다. 더 큰 걱정은 자신은 누워 있는데 행여 간호해주는 파트너가 혼자 이상한 눈길과 차별을 감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차라리 계속 벽장에서 지낸 성소수자는 괜찮을까. 아니다. 치매가 걱정된다. 실수로 커밍아웃을 해서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
2021년 10월에 있었던 사상 첫 ‘성소수자 노후인식조사’도 살펴보자. 성소수자 국민과 일반 국민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대국민 노후 준비 인식조사’와 동일한 설문 문항이 들어갔다. 큰 차이가 없는 듯했지만, ‘노후 준비 지원에 가장 중요한 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선 차이가 두드러졌다. 소득, 고용, 가족, 여가 등 총 8가지 주요 정책 중에서 성소수자는 82.3%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주거’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국민 조사에서 1위는 69.7%를 기록한 ‘돌봄을 포함한 건강’이고 주거는 46.9%로 4위였다.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걸까. 신혼부부를 위한 전세자금대출, 내집마련대출, 공공임대주택 등 다양한 주거지원 정책이 있어도 동성 커플은 혼인 신고조차 할 수 없다. 비혼도 가능한 청년 주거지원 정책은 6년이 최대 거주 기간이다. 성소수자의 삶은 6년보다 길다. 1인 가구라도 주택 청약이 가능하지만 평수 제한이 있다. 두 사람이 살기엔 너무 작다. 단순히 대출만의 문제는 아니다. 집이든 복지시설이든 일터에서든 생애 전체에 걸쳐 내가 그 어디에 있든지 학대나 차별의 두려움 없이 지낼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부동산으로 부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것은 ‘내가 나여도 안전한 공간’을 가지는 것이다. 성소수자 국민들도 염두에 둔 정책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복지시설과 의료기관이 필요하다.
대선을 앞두고 노인 공약이 쏟아진다. 어떤 후보는 노인 일자리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하러 간 곳에 차별과 괴롭힘이 있다면 그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어떤 후보는 경로당을 늘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편견과 혐오가 있는 한 성소수자 노인들은 어떤 경로당도 이용할 수 없다. 그림의 떡을 넘어서서 모든 국민을 위하려면 결론은 하나다. 차별금지법이 없다면 그 어떤 공약도 다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