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은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는데 미국은 이미 약발이 떨어진 독자제재를 되풀이하고 있다. 국제적 여론을 모으는 데도 힘이 빠진 모습이다. 중국과 러시아만 탓하기도 어렵다. 지난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직전 발표한 성명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알바니아, 아일랜드, 일본 등 6개국만이 참가했다.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이달 초 “지난 20년은 오사마 빈 라덴으로 시작해 도널드 트럼프로 끝났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2017년 5월17일(현지시각) 코네티컷주에 있는 해안경비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있다. 뉴런던/AFP 연합뉴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22년 새해의 막이 열리자마자 한 시대의 막이 내려가고 있다.
“지난 20년은 오사마 빈 라덴으로 시작해서 도널드 트럼프로 끝났다.” 사회학자 월든 벨로가 새해 벽두에 화두를 던졌다. 2001년 9·11은 미국이 군사력을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이라는 수렁에 빠뜨리게 했고, 2021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불명예 퇴진으로 막을 내렸다. 냉전 종식 후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미국의 힘은 ‘세계 최약’이라고 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먹히지 않았다. 미국이 ‘털 빠진 독수리’ 신세라는 점만 세계에 확인시켜주고 말았다.
미국이 중동이라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 중국이 약진했다. 미국의 초국가자본이 산업생산을 중국으로 이전시킨 데 큰 힘을 받았다. 미국은 대신 금융시장에 힘을 쏟아부어 한때나마 크게 재미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은 성장을 계속한 반면 미국의 금융시장은 폭락을 겪었다. 그 유탄을 백인 노동자들이 맞았다. 산업생산에서는 직장을 잃고 금융시장에서는 재산을 날렸다. 그들이 펼친 불만의 제단에 이민자와 소수민족이 희생양으로 바쳐졌고 도널드 트럼프가 제사장으로 등극했다. 그들이 작년 1월 기도했던 ‘민중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제사장은 오늘도 재야에서 건재하고 그들은 여전히 ‘구세주의 재림’을 간구하고 있다.
벨로가 지적하듯 지난 20년은 트럼프와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내우외환의 20년이었다. 내우외환으로 비틀거리는 미국에 코로나는 말 그대로 치명타였다. 이미 사회 분열로 허약한 체질이 되어 있었던데다 신자유주의로 공공보건의 저항능력과 회복력이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적 분열 때문에 백신마저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미국인이 죽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경제 회생도 주춤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최근 중국을 ‘주적’으로 몰며 세몰이를 하는 사이 세계 곳곳에 틈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 틈을 비집고 러시아의 푸틴이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작금의 우크라이나 위기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으로 서구 군사력이 러시아 턱밑까지 왔다는 절박감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소련 붕괴 뒤 끝없이 추락하던 러시아가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연가스로 서유럽을 흔들 만큼 경제적 자신감도 생겼고 군사적으로도 세계의 주목을 끌 만큼 위세를 회복하기도 했다.
유럽도 많이 컸다. 중국을 두고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듯하면서도 챙길 이익은 착실하게 챙기고 있다.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부과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연결망은 늘리고 있다. 독일이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두번째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연결한 것이 상징적이다. 러시아는 과거의 소련과 같은 배제의 대상이라기보다 사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라시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러시아와 회담을 한 것이 유럽의 내일을 상징한다.
라틴아메리카도 심상치 않다. 최근 칠레에서 좌파연합 후보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상징적이다.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던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신자유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보리치는 우익 후보를 12%포인트라는 압도적 차이로 눌렀다. 이 보리치에게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연대의 손을 내밀고 있다. “남미에서 불평등을 종식시키는 싸움에 동참하자.” 남미 좌파는 승세를 이어 바야흐로 콜롬비아와 브라질도 장악할 기세다.
미국은 북과의 대결에서도 옛날과 같지 않다. 북은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는데 미국은 이미 약발이 떨어진 독자제재를 되풀이하고 있다. 국제적 여론을 모으는 데도 힘이 빠진 모습이다. 중국과 러시아만 탓하기도 어렵다. 지난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직전 발표한 성명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알바니아, 아일랜드, 일본 등 6개국만이 참가했다. 안보리의 비상임이사국 10개국 중 쿼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인도도, 보수 우익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두고 있는 브라질도 참가하지 않았다. 멕시코와 노르웨이는 물론 가봉, 가나, 케냐도, 아랍에미리트도 동참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의 쇠락이 완연하다는 증좌를 미국의 몰락으로 읽을 수는 없다. 또 미국이 원기를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속단할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미국 단극시대의 막은 내려가고 다극시대의 막이 올라가고 있다. 이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좌표를 설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