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타파]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홍콩에서 서비스하는 디즈니플러스에는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중국 천안문 시위에 관한 에피소드가 삭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콩 당국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인데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의 눈치를 보는 콘텐츠 기업으로서는 곤란하던 차에 적절한 구실이 생긴 셈이다.
요즘처럼 매체가 범람하고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온갖 의견이 오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어떤 사실을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통편집’할 수 있겠냐는 의구심은 홍콩에서 통하지 않았다. 2019년 7월 반중시위가 한창이던 홍콩 시내에서 눈치 없이 오성홍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눈총을 받던 한 가족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봇물 터트리듯 홍콩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쏟아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컴퓨터그래픽(CG) 합성 장면을 예로 들며 ‘천안문 광장의 탱크맨이 사실은 서구 미디어의 시지일 뿐’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1989년 6월에 벌어졌던 그 사건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은 많이 봤는데, 그 사건을 서구의 모략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온 내게는 마치 ‘지구 평면설’ 같은 허무맹랑한 말로 다가왔지만, 어떤 사실을 음모로 치부하고, 더 큰 음모로 덮어버리는 일종의 중국식 선전기법에 대해서는 큰 감명(?)을 받았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통편집 우려는 홍콩 민주화 시위대 쪽에서도 나왔다. 당시만 해도 설마 거기까지 가겠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한다 생각했지만, 2020년 홍콩국가보안법이 중국 전인대 상무위로부터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그전까지 가능했던 모든 것이 그 법 하나로 불법이 되는 걸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시스템인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체제인가에 대해선 허탈함이 밀려왔다. 마치 크루아상의 겉면처럼 얇고 바삭거렸을 뿐이라고 해야 하나? 홍콩의 민주주의 붕괴를 상기하면 가장 먼저 행동이 막혔고, 그다음에는 말이 막혔다. 시민들의 말이 막히자 그 말을 대변하던 언론사가 강제로 문을 닫았고, 마지막으로 ‘비애국적인 인사’의 출마를 사전에 막아버리는 선거법 개악이 따라왔다. 고작 법 하나 생기며 시작된 일이다.
요즘도 내 텔레그램 계정에는 여전히 싸우는 홍콩 젊은이들이 존재한다. 한국은 언제나 홍콩 친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고, 민주주의를 성취한 국가로 분류되는지라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곤 한다. 대부분의 질문에 적절한 사례를 찾아 대답하는 편이지만, 국가보안법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목에 가시 하나 걸린 것처럼 껄끄러울 때가 있다. 한국에는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 있고, 종종 누군가가 그로 인해 처벌받는다는 이야기를 차마 하진 못했다. 그 친구들의 꿈을 깨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2016년 촛불혁명 이후 출범한 정부 아래에서도 민주주의의 진전을 그다지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여러 감정이 머릿속을 스쳐가기 때문이다.
요즘의 홍콩에서는 드디어 중국식 ‘천안문 학살’ 사건의 통편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홍콩대학의 상징과도 같았던 천안문 학살 조형물은 철거됐다. 아마도 당국의 교육개혁으로 이제 갓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중국에 비판적인 어떠한 내용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를 견제할 교원노조도 와해된 지 오래니 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이어질 것이다.
홍콩에서 우울한 뉴스가 도달할 때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단 하나의 법으로 인해 합법적 통치행위가 됐고 그 근원이 이 땅에도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집권세력이 국가보안법만큼이나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필리버스터까지 강행하며 반대했던 테러방지법에 대해 정작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뒤 적극적인 개정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건 유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작 그런 걸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겠냐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 ‘기우’가 현실이 되는 걸 우리는 홍콩에서 목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