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휘도 판로쉼(1956~)
디지털 세상이 되면 우리는 더 외로워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 사람을 보라. 휴가 때 데이트를 하거나 놀러 가는 대신 방에서 코딩을 했다. 틈틈이 다른 나라 코미디를 즐기면서 혼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었다.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네덜란드 사람 휘도 판로쉼(귀도 반 로섬)은 역사상 가장 친구가 많은 인물일 터이다.
1989년은 성탄절이 월요일이었다. 판로쉼의 연구실은 연말 내내 휴가로 문을 닫았다. 그는 옛날에 끝맺지 못한 일을 매듭짓기로 했다. 읽고 쓰기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었다. 이름을 파이선(Python)이라고 지었다. 작업 중 틈틈이 몬티 파이선의 대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몬티 파이선은 옛날 영국의 코미디 그룹인데, 방송을 본 것도 아니라 대본을 읽었다니 팬심이 대단하다.
파이선 언어가 태어난 때는 1989년 세밑이 될 터이다. 파이선은 배우기 쉽다. 코딩할 때나 오류를 수정할 때 좋다. 다른 사람이 써놓은 코드를 읽을 때 편하다.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읽기 편리한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파이선의 진정한 매력은 따로 있다. 판로쉼은 이 언어를 돈 받고 팔지 않았다. 무료로 풀어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게 했다. 수많은 개발자가 파이선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짜고 다시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게 라이브러리로 공개해두었다. 오늘날 웹 스크레이핑부터 딥러닝까지, 어지간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다. “파이선은 커뮤니티가 함께 키운 언어다.” 판로쉼 스스로도 이 사실을 뿌듯해한다.
파이선 공동체에서 판로쉼의 ‘공식 직함'은 한때 “자애로운 종신 독재자”였다. 애정이 담긴 일종의 농담이다. 그런데 얼마 전 판로쉼은 이 자리를 ‘사임'했다. 대입식(이른바 ‘월러스 연산자')을 파이선에 도입하는 문제를 두고 공동체 안에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아무려나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라는 의미다. 디지털 세상은 사람들을 묶어준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