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오랑시의 감염병 유행을 배경으로 한 카뮈의 ‘페스트’란 소설에서 고군분투했던 의사 리외는 그 유행이 끝났을 때 “재앙 한가운데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을 때 우리는 리외와 같은 글을 남길 수 있을까?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14일(현지시각) 워싱턴 의사당 계단에서 초당파 의원들과 함께 코로나19로 숨진 80만여 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 수는 82만1272명으로 집계됐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코로나 유행은 언제 끝나나요?” 예방의학 전문의인 내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과학기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인 답은 “그것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사적 난제인 이번 코로나 유행의 종식 조건은 의외로 잘 알려진 것들이다.
첫째, 인류 전체의 70~80%가 ‘동시에’, ‘고르게’ 면역을 획득한 상태를 수개월간 유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동시에’, ‘고르게’이다. 하지만 12월20일 현재 빈곤국에서 한번이라도 백신을 맞은 사람은 7.6%에 불과하다. 이는 백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현재 87억도스의 접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79억 인구 중 30살 이상 인구 43억명 전원을 2회씩 맞힐 수 있는 양이다. 더욱이 철학자 지제크의 말처럼 백신 연구개발을 위해 엄청난 공적자금을 지원받고도 가난한 국가들을 위해 치료약 복제를 무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는 제약회사들의 탐욕이 없었다면, 강대국의 자국 이기주의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는데 마스크를 왜 가난한 나라에 주느냐” 외쳤던 우리가 없었다면, 오미크론이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금쯤 캐럴이 울리는 연말에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밤늦도록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가 애초에 그런 결정을 할 능력이 없다면, 그다음에 기대할 수 있는 두번째 종식 시나리오는 ‘산타 바이러스’이다. 감염력이 델타바이러스의 100배이면서 치명률이 0이고 우리 몸에 중화항체를 듬뿍 만들어내는 변이 바이러스 말이다. 성탄절 전야의 공상과학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길게 보면 팬데믹의 종식은 이 두번째 방식에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산타 바이러스가 언제 올지 모르며 그사이 우리 자신과 주위의 많은 이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돈과 군사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지금처럼 계속 자연을 파괴한다면 코로나20, 21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문제다.
셋째, 다행스럽게도 앞의 방식들에 기대를 갖지 못하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가 있다. 비록 코로나 환자는 계속 생겨나겠지만, 코로나로 죽든 살아남든,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고 살다 가는 것이다. 여기서 “품위를 지킨다” 함은 예방접종과 물리적 거리두기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자신의 존엄을 위해 깨진 유리조각으로 매일 면도를 했던 이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의 적이다”라는 정치사상가 카네티의 말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 되지 않게 싸우며 사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의외로 할 일이 많다. 약간의 추가 위험과 부담이 있더라도 모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힘든 이들을 위해 나의 작은 일부라도 나누며 기왕이면 작은 상점과 식당의 물건을 사고, 택배 배달 청년 손에 음료수 하나 쥐여주는 일이다. 수십억 집값이 오르고도 몇백만원 세금을 안 내려는 이들이 좋아하는 후보 말고 지칠 대로 지친 공공병원 의료 인력을 즉각 대폭 늘리겠다는 대통령 후보를 찍는 일이다. 강대국과 다국적 제약회사에 백신과 치료제 지식재산권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구와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아픔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한다”는 아픔의 치료 원칙과도 닮았다. 의사이자 사회학자인 크리스타키스 교수가 말하는 ‘사회적 종식’의 한 형태이기도 하고 거대한 전체주의 쓰나미 속에 사상가 후지타 쇼조가 내린 저항적 결론, “살아 움직이는 평형감각과 상호 관심과 관계”와도 유사하다.
알제리 오랑시의 감염병 유행을 배경으로 한 카뮈의 <페스트>란 소설에서 고군분투했던 의사 리외는 그 유행이 끝났을 때 “재앙 한가운데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을 때 우리는 리외와 같은 글을 남길 수 있을까?
“코로나 유행은 언제 끝나나요?”라고 사람들은 묻지만, 어쩌면 그 질문은 팬데믹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이 지구에 더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 신의 마지막 시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 시험 문제는 이렇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아이들은 어른이 되나/ 얼마나 먼 바다를 건너야, 하얀 새는 쉴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