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는 매달 ‘보데가’라는 배급소를 통해 식용유·밀가루·달걀·쌀·설탕·쇠고기·담배 등 아주 기초적인 생필품이 보급된다. 7살 미만의 어린이에게는 하루에 1리터의 우유가 제공된다. 어, 이거 기본소득 아닌가. 국영배급소라는 말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이미지만 걷어내면 나름 든든한 복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어른들을 위한 로드스꼴라 여행을 기획하여 다녀온 적이 있다. 로드스꼴라 학교설명회를 할 때면 부모들은 으레 ‘아아, 내가 청소년기에 이런 학교가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라거나 ‘어른들을 위한 여행학교도 만들어주세요’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준비했다. 어른들을 위한 로드스꼴라. 첫 여행지는 당연히, 쿠바였다. 체 게바라의 책을 읽고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며 혁명과 낭만에 대한 동경을 품었을 50대에게 쿠바는 이번 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여행지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모집공고가 나가자 바로 마감이 됐다.
쿠바 여행의 주제는 크게 네가지였다. 먼저 쿠바의 의료 시스템.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무상의료를 시행한다. 무상의료를 국민의 권리와 국가 의무로 인식하고 법률로 규정한 것이다. 혁명 당시 의료 현실은 열악했다. 쿠바에 의과대학이 단 하나였다. 게다가 의사의 절반인 3천여명이 쿠바혁명 뒤에 미국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쿠바 정부는 국방비의 55%를 삭감하여 교육과 의료에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3단계(1차 가정의, 2차 지역진료소, 3차 종합병원) 무상의료제도를 확립한다. 흥미로운 건 쿠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는 지금도 미국인을 포함하여 전세계에서 오는 유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는 점이다.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란다. 쿠바는 또한 전세계 재해 지역에 많은 의료 인력을 파견하는 나라다.
두번째 주제는 녹색혁명. 사회주의 혁명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쿠바는 경제의 많은 부분을 소비에트연방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쿠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식량공급원, 수출 시장, 주요 자재의 보급원이 붕괴되자 쿠바는 굶주림, 영양실조, 전기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는다. 에너지, 시장, 경제의 관점에서 직면한 최악의 위기 상황을 쿠바는 유기농업, 도시농업, 공공수송이라는 시스템의 전환으로 맞선다. 대규모 국영농장은 소규모 가족농 중심의 유기농업 체제로 바뀌고 도시의 관공서나 주택 사이의 공터에 유기농산물을 심는 도시농장이 만들어진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생태적 전환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여전히 경제봉쇄는 계속되고 있고 한정된 자원으로 쿠바는 버티고 견디고 살아남고 있다. 쿠바의 지속 가능성은 세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디아스포라는 로드스꼴라의 주요한 주제였으므로 쿠바 이민사 또한 이 여행의 주요한 주제였다. 1905년 4월 인천항을 떠난 1033명의 조선인 노동자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 취업한다. 4년간의 노동계약이 종료된 이후 일군의 한인 노동자가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이주한다. 한인들은 쿠바 곳곳에 정착하여 삶을 지속한다. 한인회를 만들고 한글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짓는다. 또한 쿠바의 한인들은 독립자금을 모아 충칭의 임시정부에 보낸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쿠바 한인들이 보내준 독립운동 자금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까지가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면 그들은 쿠바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나간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가한 헤로니모 임, 임은조의 이야기는 놀라우면서도 흥미롭다. 헤로니모와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 법대 동기생이었다. 조선 사람이면서 쿠바 사람인 헤로니모는 쿠바의 젊은이들과 함께 변혁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든다. 혁명 이후 쿠바 정부에서 일하며 그는 쿠바의 미래와 비전을 건설하는 데 동참한다.
네번째 주제는 춤과 음악이었다. 쿠바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아바나와 트리니다드, 비냘레스, 카요라르고를 3주 동안 여행하며 이 주제와 관련된 단체를 방문하고 공연을 관람하고 살사를 추고 세미나에 참여했다.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여행이 주는 묘미는 예정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재미에 있는바 나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쿠바를 만났다. 예를 들면 이런 건데, 쿠바의 골목에는 옛날 중고등학교에서나 보던 ‘매점’ 같은 곳들이 곳곳에 있었다. 처음엔 쿠바식 편의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국영배급소였다. 아,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지. 그러니까 쿠바에서는 매달 ‘보데가'라는 배급소를 통해 식용유·밀가루·달걀·쌀·설탕·쇠고기·담배 등 아주 기초적인 생필품이 보급된다. 7살 미만의 어린이에게는 하루에 1리터의 우유가 제공된다. 어, 이거 기본소득 아닌가. 국영배급소라는 말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이미지만 걷어내면 나름 든든한 복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달 기본적인 주식이 나온다는 안도감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이지만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불안을 해소하고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장치는 될 수 있는 것, 기본소득도 그러할 것이다.
아바나대학 교수와의 만남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월급과 물가 사이의 불일치,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 이중화폐와 지하시장, 교육받은 인력을 활용할 수 없는 빈약한 산업구조를 열렬히 비판했다. 쿠바의 젊은이들은 평등하게 가난한 것보다 일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삶을 원한다며 지금의 독재정부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마음껏 정부를 비난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 앞에서 더구나 쿠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공공장소에서 저토록 신랄하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니, 쿠바는 완전 독재의 땅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도생과 몰인간적인 자본주의에 지친 마음을 가난하지만 인정이 살아 있는 사회주의 공동체에 대한 향수로 대체해보고자 한국 여행자들은 다양한 질문을 해보았지만 그는 냉정하게 우리의 로망을 무너뜨려주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바나의 한 예술학교에서 나는 얼핏 그 힌트를 보았다. 외국에서 온 방문자들을 위해 학생들은 기꺼이 환영의 연주를 해주었는데, 놀라웠다. 청소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나는 이쁘고 멋진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혹독한 핍박과 모멸감을 견뎌 살아주었기에 오늘 이토록 아름다운 연주를 우리가 들을 수 있구나. 어떠한 가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춤과 노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흑인과 백인과 아시안과 남미 원주민의 얼굴이 골고루 섞여 있는 청소년들의 얼굴을 보며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면 인류는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춤과 노래야말로 인간종의 고유성이라고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로드스꼴라 수업에 춤과 노래가 강화된 이유라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