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의료보험의 아버지’라 부르고, 여야가 합의한 국민의료보험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던 노태우를 ‘의료보험의 완성자’라 부르는 것은 역사 왜곡이자 모독이다. 진정 우리나라 의료보험을 만든 이들은 일제하에서도 서로 돕는 따뜻한 나라를 꿈꿨던 이들, 원산과 부산 등지에 노동조합 병원을 만들었던 차철순, 손창달, 부산 청십자 보험을 만들었던 장기려, 채규철, 1989년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에 공화당사 점거로 맞섰던 농민들이다.
신영전ㅣ한양대 의대 교수
“대뿔아 어디로 가려느냐?/ 다섯이고 여섯이고 낳는 대로 다 죽고 늦게야 너 하나 붙들어서/ 금지옥엽같이 손에서 놓을 줄을 모르면서도/ 그 원수의 돈으로 인해 밤낮 배타기에 너 앓는 줄 모르고 지금 이 바람 부는 밤에 어디서 물결과 싸우고 있는지/ 황천도 무심하여라”
이는 1931년 양봉근이란 의사가 마주친 민초의 삶이었다. 일제는 한반도에 자혜의원과 철도병원 등을 세웠다 자랑하지만 이는 노동수탈과 재조선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대다수 민중의 삶은 대뿔이 가족 같았다. 그러나 민초들은 서로 도왔다. 1920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가 출범하고, 1928년 원산에는 협동조합 형태의 노동병원도 들어섰다. 1941년 건국강령에는 “농공인의 면비의료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과 건강보장에 힘쓴다”고 명시했다. 이런 힘은 두레, 계, 향약이라는 오랜 상부상조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진왜란 직후 피폐한 조선에서 사족들이 계 형식으로 상주에 만든 ‘존애원’은 양반, 상민 차별 없이 싼값에 약과 진료를 제공하는 일을 180년이나 지속했다. ‘강릉 약계’도 240년간이나 지속됐다.
그러나 정작 해방된 조국의 권력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나마 1959~1960년 일부 관료들과 전문가들이 만든 의료보험안은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1962년 7월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사회보장제도 확립’이라는 지시각서를 내렸다. 그를 ‘의료보험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문서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의료보험을 즉각 실시하라가 아니라 ‘경제개발 병행’, ‘용이한 것부터’, ‘시범사업을 통해’ 등의 단서가 붙어 있었다. 결국 1963년 의료보험법안에서 ‘강제가입’ 등 조항이 삭제되어 의료보험의 시행이 좌절됐다. 기록에 따르면 국민들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을 못 가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지속적으로 “시기상조 아니냐”고 했고 ‘영국병’을 걱정했다 한다. 사회보험 이야기를 꺼내는 전문가나 관료들은 곧바로 ‘안보’를 위협하는 자로 낙인찍혔다. 14년이 지난 1977년에야 부분적으로 시행된 의료보험 역시 의료보험이 절실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하고 보험료를 걷기 쉬운 5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작했다.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의료보험의 아버지’라 부르고, 여야가 합의한 국민의료보험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던 노태우를 ‘의료보험의 완성자’라 부르는 것은 역사 왜곡이자 모독이다. 1983년 통합의료보험을 주장한 관료들을 ‘기관’으로 끌고 가 발가벗기기까지 했던 전두환 정권을 칭찬하는 대선주자는 또 뭔가? 설령 그들이 의료보험제도 시행 절차에서 부분적인 역할을 했다 해도 그들이 관심 있었던 것은 자기들 이익에 복무하는 노동력이었고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립서비스였다.
진정 우리나라 의료보험을 만든 이들은 일제하에서도 서로 돕는 따뜻한 나라를 꿈꿨던 이들, 원산과 부산 등지에 노동조합 병원을 만들었던 차철순, 손창달, 부산 청십자 보험을 만들었던 장기려, 채규철, 1989년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에 공화당사 점거로 맞섰던 농민들이다.
이런 역사의 왜곡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이는 역사관의 빈곤, 학생들에게 ‘태정태세문단세’부터 가르친 역사 교사, 권력에 아첨한 사가들, 총독부와 군사정권이 만든 통계와 기록을 성찰 없이 인용하고 가르친 결과 등에 기인한다. 그것이
일본 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고 ‘박정희 의료보험 아버지론’은 그것의 아류인 셈이다.
권력이 의료보험 시행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던 1972년 8월13일, 열차에 치여 중태에 빠진 조종래(9·창신국민교 1년)군은 부산시 좌천동 ○○신경외과에서 치료비가 없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1977년 의료보험 일부 시행 직후 2.3배나 증가한 입원율은 의료보험 실시 지연으로 인해 조종래 학생처럼 끝내 응급실 문을 열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오욕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2020년 17살 청년 정유엽군은 코로나가 의심된다며 입원을 거부당해 여러 병원을 떠돌다 죽었다. 제2, 제3의 사례가 속출하고 있지만, 공공병상 늘릴 생각도 하지 않는 여야 정치인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시계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기에 멈춰 있다. 거의 유일한 보건의료부문 대선공약이었던 의료보장 수준 70% 달성에 턱없이 모자라는 성적표를 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권은 또 어떤가? 그런데 누가 의료보험을 말하는가? 부끄러워할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