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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재정 칼럼] 적대관계를 ‘리셋’하라

등록 2021-10-24 18:10수정 2021-10-25 09:08

핵무기와 미사일이 위협이 되기도 하고 안전판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결국 그 보유국과의 관계성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는 서로 상대국에 ‘적국’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넘어서자면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할 수밖에 없다. 적대적 관계를 ‘리셋’해야 한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재정ㅣ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영국은 냉전 시기 550기가 넘는 핵탄두를 보유했지만 미국은 이를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1952년 핵무기 시험을 시작으로 45회에 걸쳐 핵시험을 했지만 이를 도발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영국의 핵무기 개발을 지원했고, 영국의 핵무기 생산이 더뎠던 시기에는 미국 핵무기를 영국군에 제공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북은 6차례 핵시험을 실시할 때마다 ‘도발’이라고 비판을 받았고 유엔의 제재를 받았다. 현재 수십 기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핵탄두는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다. 북이 핵탄두를 투하할 수 있는 수단인 미사일과 잠수함을 개발하는 것도 중대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미사일 방어와 ‘적 기지 공격 능력’이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식한다.

‘왜 그럴까?’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알렉산더 웬트가 물었다. 아마도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지점에 의문부호를 붙인 것이다. 핵무기 자체만을 보면 도시 하나를 파괴시키고 엄청난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이다. 누가 보유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대량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물건’인 핵무기이지만, 왜 그 사회정치적 의미는 정반대로 인지되는 것일까?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답했다. “북한의 군사적 시위는 분명히 유엔 안보리 결의, 즉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다. 우리는 국제법 테두리 내에서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있다.”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핵무기 비확산 조약을 위반한 것이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이다. 북이 탄도미사일을 시험하는 것도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이다. 즉 국제법을 위반했으니 도발이라는 것이다.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 영국의 핵무기 개발과 다르고, 한국의 미사일 시험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일차원적인 답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사실만 나열하면 또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핵무기이고 같은 미사일인데 왜 이쪽은 합법이고 저쪽은 도발인가?

웬트는 구성주의 국제정치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그의 명저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에서 명쾌하게 논파한다. 그 답은 국가의 정체성에 있다. 우리는 오랜 상호관계의 집적물로 국가들에 대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미국은 ‘동맹국’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러니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대한민국 안보의 대들보로 인식된다. 미국의 핵무기는 한국의 안전이고, 영국의 핵무기는 미국을 지켜주는 수단이다.

반면 한국과 미국에서 북한은 공히 ‘적국’이다. 북한은 남침을 자행한 침략국이고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적이다. 북한의 정체성이 적국인 이상 그 손에 나뭇가지 하나라도 들고 있다면 몽둥이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뭇가지가 아니라 핵무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고, 미국에는 국가 안전에 도전하는 수단으로 보이게 된다.

핵무기와 미사일이 위협이 되기도 하고 안전판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결국 그 보유국과의 관계성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는 서로 상대국에 ‘적국’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웬트의 말대로 결국 정체성이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넘어서자면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할 수밖에 없다. 적대적 관계를 ‘리셋’해야 한다. 종전선언의 중요성은 그것이 이 리셋 과정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언만으로 관계가 새롭게 구성되지는 않는다. 연애를 하다가 싸운 연인이 재결합을 선언하기만 하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서로가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북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를 ‘도발’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신중하게 발언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부족하다. 대한민국이 개발하고 있는 무기체계가 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면 북에서는 안심을 할까?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북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발표하면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할 사람이 북에 몇명이나 될까? 적대 의사가 없다고 바이든 행정부 관리들이 발언하면 이제 평화가 왔다고 믿을 사람이 북에 있을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은 중요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는 않지 않는가. 남도 북도 미국도 적대관계를 리셋하기 위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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