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지표가 ‘목표’가 되면 지표는 정치행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마다 발표 전에 자신의 순위를 미리 알아내려고 하고, 지표작업을 하는 연구팀을 접촉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고위급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이상헌ㅣ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농담처럼 던진 말이 따끔한 진실이나 진심인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어마무시한 ‘법칙’이 되기도 한다. 찰스 굿하트라는 영국 경제학자의 이름을 딴 ‘굿하트의 법칙’이 그랬다. 복잡한 통화정책 얘기를 다루다가 나왔는데, 영국의 인류학자가 좀 더 쉽게 설명했다. “척도(measure)가 목표(target)가 되는 순간, 더이상 좋은 척도일 수 없다.”
사례는 넘친다. 가령, 식민지배 시절 영국이 제 나라에 없는 뱀이 인도에 창궐하는 걸 보고 무서워한 나머지 뱀을 잡아오면 보상하겠다고 했더니, ‘영특한’ 인도인은 뱀을 아예 키운 뒤 죽여서 더 큰 돈을 벌었다. 죽은 뱀의 숫자는 늘었으니 이 척도로는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숫자도 늘었으니 정작 목표인 영국인의 안전 확보에는 실패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이 법칙이 의외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약 20년 전에 세계은행은 ‘기업환경평가’ 지표를 개발했다. 시메온 댠코프(Djankov)를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국가 간 비교 연구를 통해 기업규제가 사실상 정치인과 관료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경제성장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 것에 힘입어, 세계은행은 각국의 기업규제를 수치화한 지표를 만들었다. 조세, 창업과 부도 절차, 고용과 해고의 용이성 등 주요 분야를 망라했다. 국가 순위도 발표했다. 순위를 매겨 국가 간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자는 계획이었다. 지표의 ‘씨앗’을 뿌린 댠코프가 기술적 작업을 주도했다.
세계은행의 영향력 덕분에 이 평가 지표는 맹위를 떨쳤다. 특히 세계은행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은 매년 발표되는 나라별 기업환경평가 순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순위 경쟁에서 결과가 나쁘면 해당 국가는 순위를 올리기 위해 각종 법규 개정을 해야 했다. 심지어 대통령이나 총리가 순위를 몇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것을 국정과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세계은행은 이 지표의 개선이 경제 성과의 개선을 가져온다는 연구를 들이대면서, 지표가 ‘믿음’이 아니라 ‘과학’임을 주장해왔다.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규제는 악’ 또는 규제는 없을수록 좋다는 단순한 전제도 문제였고, 기본적으로 법률적 표현인 규제를 수치화하는 방법을 둘러싸고도 잡음이 많았다. 게다가 법률은 무시무시하지만 거의 적용되지 않아 규제가 ‘종이호랑이’ 신세인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는 빈껍데기인데 지표상으로는 ‘호랑이’가 된다.
가장 큰 논란은 고용과 해고에 관한 지표였다. 채용과 해고가 쉬워야 하고, 노동시간이나 임금 관련 규제는 없는 상황을 최적의 기업환경으로 상정하고 지표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노동계와 학계의 반발이 뒤따랐고, 몇차례 방법론적 수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평가 지표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세계은행 지표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고, 각국 정부는 순위가 개선되면 대대적인 선전을 했고 지표가 악화되면 숨기거나 지표의 신뢰성을 문제삼았다.
이렇게 지표가 ‘목표’가 되면 지표는 정치행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마다 발표 전에 자신의 순위를 미리 알아내려고 하고, 지표작업을 하는 연구팀을 접촉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고위급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기업, 언론, 정치권에서는 세계은행의 평가 지표를 성배로 삼아 ‘사사로운’ 규제완화를 ‘공익’의 이름으로 요구했다. 한국의 지표 활용법도 다르지 않았다. 순위가 오르면 정부는 자신의 정책 방향과는 관계없이 대대적인 홍보를 했고, 순위가 떨어지면 언론과 재계에서 규제 때문에 곧 경제가 파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사달이 났다. 중국은 오랫동안 이 평가 지표에 불만을 제기했으나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2017년에 세계은행의 최고위급 인사를 통해 순위 개선을 요구했다. 보는 눈도 많고, 특히 미국이 이 지표와 관련된 작업을 면밀히 챙겨보고 있는 터라, 임의적 변경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방법론적 개선책을 찾았다. 예컨대 홍콩을 중국에 포함시킨다든지, 중국 전체가 아니라 베이징과 상하이만 고려한다든지. 그 어느 것도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세계은행의 최고경영자(CEO)가 나섰다고 한다. 대부분 지표가 사실상 전문가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인 만큼, 일부 지표에 대해 ‘정무적’ 판단을 가미해서 중국의 순위를 상향 조정했다. 이렇게 해서 원래 85등이었던 것을 78등으로 만들었다. 그 전해에도 78등이었다.
이런 ‘지표 조작’을 주도한 당시 세계은행 최고위급은 지금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이고,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이 지표의 ‘과학적 기초’를 정초한 경제학자 댠코프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불가리아 출신이다.
논란이 커지자, 세계은행은 기업환경평가를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하지만 반응은 미묘하게 갈린다. 지표의 정치적 조작을 비난하면서 현 국제통화기금 총재의 즉각적 사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게 이는가 하면, 이런 ‘비과학적’ 개입이 문제일 뿐 지표의 과학적 신뢰성은 여전히 높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세계은행 지표의 비현실적인 단순성과 규제완화 편향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서 나라별 순위를 발표함으로써 일그러진 경쟁을 유도한 점이다. 지표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던 지난달, 지표의 신뢰성을 따지는 전문가 보고서도 같이 발표되었다.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이 보고서는 순위 매기기를 그만둘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지표의 편향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되기도 한다. 문제의 2017년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에 속했다. 성장률이 둔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7% 정도였다.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이 정도의 성장을 보인 나라는 없었다. 적어도 중국 입장에서는 기업환경평가 지표가 곧 기업 성과와 경제성장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지표를 잘못 측정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세계은행 내에서 지표를 이용한 ‘지대추구행위’도 만만치 않았다. 지표에서 순위가 많이 밀린 나라들은 세계은행에 ‘자문 서비스’를 요청했다. 돈을 지급하고 순위 개선 방식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그렇게 하면 다음해에 순위가 올랐다. 지표작업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순위 개선을 구매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굿하트의 법칙은 그나마 척도가 옳을 때 맞는 얘기다. 잘못된 척도가 목표가 되면 그 척도는 사회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끈다. 그간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온 국가경쟁력 지표들을 경계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