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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재정 칼럼] 존재하지 않는 전쟁, 대를 잇는 전쟁

등록 2021-09-26 18:48수정 2021-09-27 09:26

미국의 공론에 한국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전쟁이므로 종전선언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미국은 침묵 속에 세계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이틀 뒤인 지난 23일 다시 종전선언의 화두를 꺼냈다. 그 연설이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까?

서재정ㅣ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언했다. ‘전쟁은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원하는 종전선언이었을까?

지난 21일 바이든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엄숙하게 선언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철군이 완료됐으니 미국은 이제 더 이상 전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이미 국가안보전략에서 “영구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은 20년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고, 그 전쟁을 끝내겠다고 한 것이었다. 70년이 넘은 한국전쟁은 가장 긴 전쟁의 명단에 끼지 못했다. 영구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했지만 한국전쟁의 종식은 국가안보전략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한국전쟁은 없다. 그의 국가안보전략에도 한국전쟁은 없다. 아예 언급되지 않는 전쟁이니 끝내야겠다는 다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 <뉴욕 타임스>의 마크 마제티 기자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단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을 뿐이지 전쟁을 끝낸 것은 아니라고. 바로 그 전날 미군은 시리아에서 드론을 이용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알 카에다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 3주 전에는 소말리아에서 샤하브 군사조직을 겨냥한 폭격을 퍼부었다. 아직도 이라크에는 25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시리아에는 900명이 남아 있다. 중동에서 작전 중인 미군은 4만명 이상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바이든 대통령 스스로 공언하기도 했다.

마제티가 맞다. 미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하지만 그도 틀렸다. 미군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여러 나라를 언급했지만 그에게도 한국전쟁은 없었다. 1950년부터 북과 전쟁을 하고 있고, 그 전쟁의 일환으로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바로 얼마 전에도 한국군과 미군은 연합훈련을 실시했지만 마제티의 전쟁 목록에 한국전쟁은 없었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미국의 국외 군사개입에 비판적인 앤드루 베이세비치도 마찬가지다.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충실한 장교로 복무했던 그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수많은 저술을 통해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처에서 군사적 개입을 벌였다고 지적하며 이를 “영구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을 영구 전쟁으로 몰고 가는 ‘워싱턴 규칙’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규칙’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국전쟁은 그의 관심 밖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자유낙하하던 미 국방예산이 다시 급상승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때 치솟았던 국방예산은 아직도 그 수준을 맴돌고 있다. 앞날이 불투명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확실한 군사동맹이 되었고, 피점령국이었던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독립을 얻고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존 아이켄베리는 미국이 수립한 전후질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라고 부르지만 존 미어샤이머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힘에 기반한 현실주의적 국제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국방예산과 군사력과 군사동맹과 국제질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 아이켄베리도, 신현실주의자 미어샤이머도 그 출발점이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해서 미국의 공론에 한국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전쟁이므로 종전선언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미국은 침묵 속에 세계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마크 램버트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그런 속내를 살짝 드러냈다. 그는 24일 한미연구소 주최 화상대담에서 종전선언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든 주한미군 주둔이나 한-미 동맹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잘못된 인상을 북한에 주면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유엔 연설 이틀 뒤인 23일 다시 종전선언의 화두를 꺼냈다. 그 연설이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같은 날 김석주 일병이 7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그는 유해가 되어 귀환했다. 간호장교가 된 외증손녀 김혜수 소위의 품에 안겨서. 한반도에서는 이렇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를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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