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돌아왔다. 세상의 혐오와 무책임함 때문에 어이없는 고초를 겪었던 ‘나다움 어린이책’이 1년 만에 당당히 귀환했다. 기쁜 소식이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거다. 작년 이맘때쯤에 보수개신교, 국회의원, 여성가족부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몇 권의 어린이책을 순식간에 금서로 만든 것을.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은 꽤 괜찮은 기획이었다. 성평등 가치를 담은 도서 선정뿐만 아니라 국내 창작물 제작 지원, 도서 보급 및 독서 프로그램 개발, 전시회, 토론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기업인 롯데가 3년간 9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잘 진행되었으면 성공적인 민관 협력 사업의 사례가 되었을 텐데 엎어졌다. 한순간이었다. 2020년 8월25일, 갑자기 김병욱 국회의원(현 국민의힘)이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성가족부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남녀 간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책을 초등학교에 보급했다며 비난했다. 동화책에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지낸다며 이성 간일 수도 있고 동성 간일 수도 있다고 쓰인 대목은 동성애 조장으로 둔갑했다.(왜 이성애 조장이란 의심은 없는가!)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설명하는 그림에서 엄마와 아빠를 (이불을 덮은 상태가 아니라) 벗은 몸 상태 그대로 그렸다고 ‘적나라한’ 그림이 되었다. 편협함이 빚어낸 해프닝으로 끝났어야 했지만, 여성가족부는 바로 다음날 해당 도서들을 모두 회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을까. 아니다. 당시 해당 도서들은 전국에 고작 5개 학교에 보급되었을 뿐이었다. 정부가 책임 회피부터 하니 민관 협력도 깨졌고 결국 사업은 조기종료되었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전개다.
원래 ‘나다움 어린이책 교육문화사업’의 취지는 어린이들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고,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이라는 두개의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다. 대외적으론 선진국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성차별과 젠더에 기반한 폭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텔레그램 엔(n)번방을 비롯해 화장실 내 불법촬영 등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많은 성범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은 기성세대보다 더 많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있는 또래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나다움’이란 얼마나 적합하고 절실한 기획인가.
그래서일 것이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도서 선정위원들과 이 사업의 기획·진행을 맡았던 씽투창작소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움북클럽’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뭉쳤고, 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2019년에 선정한 134종의 도서와 2020년의 65종에 이어 2021년에 새로 추가한 어린이 및 청소년 도서, 과거에 사전 검열로 부득이 빠지게 되었던 도서 11종까지를 포함해 총 262종의 나다움어린이청소년책을 뽑았다. 이 도서목록이 담긴 책이 얼마 전, 9월9일에 드디어 출간되었다. 북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였으니 시민들의 힘으로 되살린 것이다. 책 이름은 ‘오늘의 어린이책 1’. 책 제목에 1이란 숫자가 있는 건, 앞으로 매년 도서목록을 추가해서 발간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밥 한끼를 위해서도 꼼꼼히 맛집을 검색하지 않는가. 멋진 독서의 세계로 안내하는 가이드북이 이렇게 있으니 든든하다.
마침 추석 선물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니 더 좋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책을 선물하자. 여자니까, 남자라서 등의 성역할에 갇히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게 해주는 책을, 자신과 타인의 소중함을 알기에 성폭력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법도 알려주는 책을, 서로의 차이로 멀어지는 대신 서로의 차이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주는 책을. 그럼 세상이 바뀐다. 김유진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도 이렇게 말했다. “내일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오늘의 어린이책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