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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경험해보지 않아 모르는 것들

등록 2021-09-07 18:49수정 2021-09-08 02:32

나이 든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는 “내가 겪어봐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서로 다른 트랙으로 겪어낸다. 내가 겪은 87년 이후의 시간대와 그 무렵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겪은 시간대는 동일하지 않다. 60년대생인 나는 80~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청년들의 생애주기적 경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흔히 젊은 세대를 가리켜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장년세대 역시 자기 후대의 생애사적 경험에 대해 무지하다. 겪어보지 못해 모른다.

이진순ㅣ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불볕더위가 한풀 꺾이면 기필코 손보리라 작정한 일이 있었다. 베란다에 켜켜이 쌓아둔 오래된 책들을 처분하는 일이다. 이사할 때마다 몇 상자씩 추려내 정리를 했건만 손때 묻은 애틋함 때문에 끝내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80~90년대의 책들이다. 엉성한 책꽂이에 두겹으로 빽빽이 꽂아놓은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렇게 바랬다. “인정사정없이 몽땅 다 버릴 거야”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뭉텅이로 집어서 상자에 담아내다가도 흠칫흠칫 손길이 머무는 건 어쩔 수 없다.

기형도와 김남주와 마종기의 시집, 조선의용군 출신 작가 김학철의 <격정시대>, 중국의 노동운동가 등중하의 일대기를 다룬 <내 영혼 대륙에 묻어>,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윤정모의 <고삐>… 이미 고인이 된 작가들도 많고 지금은 절판이 된 책들도 많다. 집회 유인물만 갖고 있어도 잡혀가던 시절이라 금서로 분류되던 책들은 그때그때 치워버렸고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남겨놓은 게 이렇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흔적은 이게 전부다.

내겐 젊은 시절을 추억할 사진이나 일기장, 메모장 같은 게 없다.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과 사진을 찍지 않았고 전화번호 적힌 수첩도 수시로 태워 없앴다. 나름 치열하게 산다고 자부하던 시절이었다. 선명하지만 엉성하고 열정적이지만 치기로 가득했던 시절을 돌아보는 마음은 애잔하다. 그러나 추억은 추억이다. 30년 전 독서목록으로 다져진 생각을 가지고 지금도 문제해결의 최전선에 서 있는 양 유세를 떨 일은 아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는 “내가 겪어봐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서로 다른 트랙으로 겪어낸다. 내가 겪은 87년 이후의 시간대와 그 무렵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겪은 시간대는 동일하지 않다. 60년대생인 나는 80~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청년들의 생애주기적 경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어려서부터 같은 평수의 아이들끼리만 어울리는 유년기를 거치지도 않았고, 지방 명문대의 인기가 추락하면서 ‘인서울’에 모든 걸 걸고 사교육에 끌려다녀본 적도 없으며, 아이엠에프로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부모를 보면서 ‘직장생활 열심히 한다고 잘 사는 건 아니구나’ 충격을 받은 경험도 없다. 흔히 젊은 세대를 가리켜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장년세대 역시 자기 후대의 생애사적 경험에 대해 무지하다. 겪어보지 못해 모른다.

서울연구원이 올해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들이 체감하는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4.63점이다. 부모의 지위가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6.3%가 ‘심각하다’고 답했으며 ‘본인의 취업이나 승진에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 역시 81%를 넘어선다. 노력해서 성취하기보다는 부모에 따라 부와 지위가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이 모든 게 보수기득권 토착왜구 때문이니 역사의식을 가지라’고 일갈하는 일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은 어이없고 황당하다.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고 대응하려는 태도는 고도성장기 한강의 기적을 그리워하는 태극기 부대와 다를 바 없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토지자산 배율이 4.6으로 오이시디(OECD) 16개국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부동산 문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니면 해결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 폭등에 따른 불로소득 환수와 국토 균형발전 전략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최근 국회는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과세 기준을 현행 공시가격 9억원에서 11억원으로 상향하는 종부세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여야가 따로 없었다. 재석 219명 중 169명이 찬성했다.

내년 대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대전환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 여전히 대선후보들은 입을 모아 대규모 택지개발과 주택공급 확대를 주장한다. 주택보급률이 이미 100%를 넘는데 집값이 계속 폭등해온 이유는 도외시한다. 선거 때만 되면 청년들을 마케팅 대상으로 삼아 춤추고 노래하는 걸로 환심 사려는 광대 짓은 제발 그만두길 바란다. 기후위기, 교육개혁, 군대개혁 모두 미래세대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지금껏 해보지 않은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경험하지 못해 모르는 문제는 몸으로 직면해 알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물어서 배워야 한다. 그게 격변의 전환기, 지도자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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