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트남 일을 할 때나 인도와 관련한 일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도 어려운데 남의 나라 일을 뭘 그리 열심히 해요”였다. 그런 반응은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사람도 살기 힘든데 뭐 동물까지 신경 써요”로 이어진다. 오랜 경험으로 내가 알게 된 건 베트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한국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동물이 처한 환경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애정이 많다는 것이다.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학생들과 함께 영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 영국문학, 창의적 공공성, 축구와 뮤지컬을 주제로 두달 동안 런던, 맨체스터, 리버풀, 배스, 에든버러, 헤이온와이 등지를 돌아다녔다. 런던에서 3주를 머무르니 학생들이 서울에서처럼 자유롭게 지하철을 타고 가 축구를 보고 오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숙소 근처의 피시앤칩스 사장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 재밌었다. <해리포터>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조앤 롤링이 초고를 썼다는 카페에 가서 끄적끄적 글도 써보고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차를 타보기도 하고 뮤지컬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레미제라블>이나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오기도 했다.
작가의 집이나 박물관이나 갤러리도 재미있었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건 세컨드핸드숍(Second hand shop)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의 가장 한가운데에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름다운 가게’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폭풍의 언덕>으로 유명한 하워스는 연 20만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조그만 동네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옹기종기 몰려다니는데 카페와 빵집과 선물가게 사이에 세컨드핸드숍이 있었다. 국제아동기구에 기부를 하는 단체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신기했다. 저 노른자위 땅에 다른 가게를 연다면 분명 돈을 더 벌 수 있을 텐데 재밌는 동네군 했는데 윈더미어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사람들도 여름 휴가지로 좋아한다는 중부지방의 호수마을, 시인 워즈워스의 집을 구경하고 시내로 오니 그곳에도 세컨드핸드숍이 무려 두군데나 있었다. 역시나 국제아동기구에 기부를 하는 단체가 주관하는 곳이었다. 크지도 않은 시내에 그다지 돈벌이가 될 거 같지 않은 구제가게가 밥집과 찻집과 슈퍼마켓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버티고 있다니, 자본주의의 룰에 어긋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70대로 보이는 은발의 할머니가 오래된 찻잔들을 닦아 다시 진열하고 있었다. 맞은편 가게에서도 백발의 할머니가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웨일스 지역의 유명한 책마을 헤이온와이에도 가장 한가운데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간판을 건 세컨드핸드숍이 있었다.
뭐지, 이 금싸라기 같은 땅에 왜 이런 가게들이 있지? 영국 여행의 전체적인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던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하자 영국 사람들의 특성 같은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야기인즉슨 한 시절 어쨌거나 ‘제국’을 경영해본 사람들이라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를 든 이야기. 자신이 사는 동네의 지자체가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과 자매결연 같은 걸 맺고 해마다 지원을 하고 있는데 어느 해인가 예산이 부족해 올해부터는 더 이상 아프리카에 돈을 보내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자 주민들이 해당 지자체 앞에서 시위를 했단다. 아프리카의 그 지역도 우리가 보내는 돈을 고려해 예산을 짤 텐데 이렇게 갑자기 중단해버리면 그 동네는 어떻게 하느냐, 지속적으로 돈을 보내라는 내용의 시위를 계속해 결국 하던 대로 지원을 계속했다고. 그러면서 선생님이 보탠 말, “영국의 총리 선출과 필리핀 해일이 같은 날 일어나면 여기선 필리핀 해일 뉴스를 먼저 전하더라고요.”
부러움과 질투와 억울함이 동시에 마음속에 일었다. 영국이 인도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약탈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명 ‘선진국’이 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그들은 눈을 들어 세계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마음의 지도가 확장되면서 세계시민의 자질과 감수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케냐의 아이가 굶주릴 때, 홍콩에서 시위가 벌어질 때, 팔레스타인의 아이가 죽어갈 때 그들에게 그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닌 내가 관여해야 할, 우리가 참여해야 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제국주의의 유산이 ‘연결의 감수성’이라니 모순적이고 역설적이지만 이런 점이 인류라는 종이 갖는 독특함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 내가 베트남 일을 할 때나 인도와 관련한 일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도 어려운데 남의 나라 일을 뭘 그리 열심히 해요”였다. 그런 반응은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사람도 살기 힘든데 뭐 동물까지 신경 써요”로 이어진다. 오랜 경험으로 내가 알게 된 건 베트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한국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동물이 처한 환경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애정이 많다는 것이다. 화성 탐사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은 지구의 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어느샌가 되었다, 혹은 되어버렸다. 얼마 전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가 변경됐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1964년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유엔 산하 정부 간 기구라 한다. 이 기구의 올해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은 이제 그룹 A(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지위를 변경할 것을 가결했다고 한다. 이 말인즉슨 이제 한국도 글로벌 의제에 대해 메시지를 내고 창의적 담론을 주도해나가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이웃들의 인정을 받았으니 그에 걸맞은 의지를 갖고 모색하고 행동하고 기여하는 역할을, 세상에나 우리가, 해야 할 때가 도래해버렸다. 유엔무역개발회의 설립 이래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보기에 한국은 이제 몹시도 풍요로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국가인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지표와 상관없이 우리 마음은 여전히 식민지와 전후에 머물고 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전쟁과 독재의 시기를 허겁지겁 각자도생으로 살아내느라 눈을 들어 세계를 볼 마음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우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목숨을 걸고 독재를 몰아내고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고 새벽별을 보며 출근을 한 20세기적 근력과 지구력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비옥하고 풍성한 마음밭 위에 21세기의 사과나무를 심을 때다. 인류의 공적 자산을 공유하고 동시대와 연대하며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자는 요구를 우리는 요청받고 있다. 마음의 허기증을 가라앉히고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볼 일이다. 지구연방, 성간(星間) 네트워크 같은 구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국가와 종과 행성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뭇 생명이 더불어 활활발발하게 살 수 있는 상상.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담대하고 명랑하고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