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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해묵은 고용보장 요구의 정당성

등록 2021-08-24 14:26수정 2021-08-25 02:07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고용보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가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산업혁명 이후 200여년 동안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검증됐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헌법상의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의 존치를 주장하는 단식농성이 60여일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일 단식농성장에서 노동운동을 함께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와 하종강씨가 30여년 만에 만났다. 사진 하종강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의 존치를 주장하는 단식농성이 60여일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일 단식농성장에서 노동운동을 함께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와 하종강씨가 30여년 만에 만났다. 사진 하종강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상가 공중화장실에서 양복 차림의 멀끔한 사내가 흘끔흘끔 나를 계속 쳐다봤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 뒤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아는 체하지는 못했다. 동시에 건물 현관을 나섰는데 길에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활짝 웃는다. ‘아는 사람이었군’ 싶어서 마주 웃어주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오셨죠?” 아, 그랬구나, 평소 아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아, 예….” 멋쩍게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사내가 재빠르게 말을 잇는다. “요즘처럼 산업 주기가 빨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많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왜 고용 안정을 강조하셨어요?”

아, 그걸 따지고 싶었구나.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인터뷰였을 텐데, 그 사람은 그 말이 가슴에 맺혔나 보다.

“그러한 주장이 너무 적어서요. 노동 유연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고용 안정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바람직한 사회일 텐데, 노동자 고용 안정을 주장하면 마치 매국노처럼 취급당하는 상황이어서요.”

다행히 사내는 “아, 그래서요…”라고만 했을 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자기 갈 길로 갔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거나 말이 통하지 않을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사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고용 안정 주장은 어느 상황에서나 옳다”고 주장하는 편에 서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야 기업은 노동자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업 경영을 개선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기업이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국가경제에도 유익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 유연성’에 대해 “기업이 노동자를 채용하고 해고하는 유연성”만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것뿐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이 원하는 기업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이 나머지 절반이다. 1998년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당시 미국의 ‘카우보이 자본주의’를 집중 보도한 한국 보수 언론의 기사 제목도 ‘해고 쉽지만 재취업 더 쉽다’였다.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보다 해고된 노동자가 다른 기업에 재취업하는 것이 더 쉽다는 뜻이다.

지난주 금요일,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의 존치를 주장하는 단식농성 60일째 하루 단식에 참여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한 사람이 마침 언론사 취재진과 같이 농성장에 들어섰다. 30여년 만의 만남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취재진이 나에게도 질문을 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에게 하종강씨는 어떤 존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항상 욕먹는 대학생 친구였지요. ‘너는 대학생이니까…’, ‘너는 지식인이니까…’, ‘너는 배운 놈이니까’, ‘너는 먹물이니까…’ 그렇게 지적하면서도 함께해준 노동자들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가 뒤이어 말했다. “그런데 저는 하종강씨한테 싫은 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그 노동자에게는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버리고 우리 곁에 있어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듣고 있던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올해로 44년째 복직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 모두가 복직 요구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노동자 고용이 보장돼야 소득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구매력 기반이 갖추어지고, 건전한 내수가 창출되고, 사회 양극화가 줄어들고, 경제위기에서도 견딜 수 있고, 경제성장도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에 터 잡아 40년 넘게 복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고용보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가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산업혁명 이후 200여년 동안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검증됐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헌법상의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서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을 때 “자본은 ‘회사 결정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필요한 조처’라며 정리해고를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다. 나를 잘 활용하라. 기꺼이 이용당하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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