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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범선의 풀무질] 무책임한 제국과 한국

등록 2021-08-23 04:59수정 2021-08-23 08:20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카불이 생각보다 빨리 무너졌다. 미군이 훈련한 30만 아프간 대군도 속수무책이었다.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국민을 버리고 줄행랑쳤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교를 폭파하고 도망친 이승만이 떠오른다. 카불 공항은 아비규환이었다. 미 공군 수송기 한대에 600명이 넘는 아프간 난민들이 빼곡히 탑승했다. 흥남 철수작전이 연상된다. 미군은 31일까지 자국민과 부역자들을 전부 피난시킬 계획이다. 지금도 비행기가 계속 오간다. 워싱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바이든의 성급한 철수 결정을 비판한다. 언젠가는 나와야 했지만 이토록 혼란스러운 마무리는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바이든은 자신의 결단을 이렇게 옹호한다. 20년 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유는 알카에다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10년 전 오사마 빈 라덴을 죽였기 때문에 그 목표는 달성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또 다른 목표였던 정권교체와 국가 건설은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미국이 타국을 점령, 지배하는 것은 전략적이지 않다. 아프간 여성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미국은 이미 1000조달러를 쓰고 3000명 가까운 군인을 희생하지 않았나.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을 “모든 제국의 무덤”이라고 이른다. 더 이상 미국은 자유세계의 지도자로서 제국을 확장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바이든은 트럼프와 다르지 않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씁쓸하다. 바이든이 실수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정권교체와 국가 건설을 통해 대한민국은 태어났다. 미국이 제국이라면 한국은 일등 모범 식민지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라고 했을 때도 자랑스럽게 참전했다. 미국에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했다. 1조원 넘게 원조했고, 윤장호 하사를 잃었다. 탈레반의 승리는 미국의 패배일 뿐 아니라 한국의 패배다. 나토의 패배이자 미 제국 전체의 패배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패권을 물려받았던 미국의 세기가 막을 내린다. 자유의 깃발을 당차게 흔들며 세를 확장하던 미국이 어느새 전략적 이익을 핑계로 후퇴한다. 제국의 최전방인 동두천에서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으로 복무했던 나는 바이든의 반제국주의적 수사를 듣기가 민망하다.

동맹국의 불안을 염려했는지 바이든은 대만,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후자는 내전 상태에 있고, 부패한 친미 정권이 탈레반과 싸우려는 의지조차 안 보였기 때문에 미국도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대만, 한국도 여전히 내전 상태에 있지 않은가? 가니의 의지가 꺾인 것은 애초에 미국이 철수를 결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국전쟁 때 미국이 지금처럼 철수했다면 어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바이든은 제국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뿐이다.

미국은 태생부터 영국과는 다른 제국이었다. 제국이기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지못한 제국이었다. 4년마다 대통령이 바뀌는 것도 한몫했다. 식민 통치 정책에 일관성이 없었다. 그래도 2차대전 전후에는 승승장구했다. 독일과 한국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그때가 제국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부터 자신감을 잃었다. 바이든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사이공과 카불이 다르지 않다. 진작에 버렸어야 하는 실패작이다.

마지못한 제국의 무책임 앞에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난민을 돕는 것은 참전국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다. 나아가 미국이 책임감을 발휘하도록 부추겨야 한다. 기후·생태 위기 앞에 지구촌은 어느 때보다 통합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 미국이 아니면 중국, 러시아 혹은 무질서다. 우리는 아프간 여성들의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의 식민 지배보다 끔찍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책임 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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