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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제크 칼럼] 탈레반의 ‘순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등록 2021-08-22 11:36수정 2021-08-23 02:08

슬라보이 지제크 ㅣ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정부군은 싸울 의지도 보이지 않고 투항했다. 서구 언론은 탈레반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을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미성숙함, 탈레반의 극단적인 폭력성과 종교적 광신, 아프간 정부의 부패와 무능 등을 이유로 들어 설명한다.

하지만 서구 언론이 언급하기를 애써 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탈레반이 자살적인 행위를 행해서라도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탈레반을 순교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로 보아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는 그들이 자신의 신념에 헌신하는 참여하는 주체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지점을 고려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지닌(이 경우 신념이 지닌) 물질적 힘을 설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념의 힘은 단순히 강한 확신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을 지닌 이가 자신의 믿음에 직접 존재론적으로 헌신하고 있음에 기반한다. 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믿음을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다.

미셸 푸코가 1970년대 말, 이란 이슬람 혁명을 지지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푸코는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근대 서구의 방식으로는 진리를 말할 수 없고, 당파적이고 맞서 겨루는 방식으로만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특수한 관점에 서서 싸우고자 하는 이들만이 역사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 가능성을 이슬람 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그런 주체 위치에 서는 것을, 근대적 개인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의 징후로 폄하하고 넘어가면 그만일까? 그것을 파시스트적 퇴행으로 비난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

루카치 죄르지는 마르크스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면 그것은 그 당파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특수한 주체 위치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바로 그 당파성 ‘때문에’ 보편적 진리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투쟁에 참여하는 일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아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푸코가 이란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실을 당파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근대 서구 담론의 실증주의적 관념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이자, ‘역사의 종언’을 뒷받침한 이데올로기다. 여기에서는, 한쪽에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지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신의 작은 쾌락만을 살피는 개인들의 ‘자기 배려’(푸코가 이슬람 혁명의 결과에 실망한 후 사용한 용어인 ‘자기 배려’)가 있다. 이런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은, 목숨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헌신을 그저 의심스럽고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푸코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기대지 않고 공동의 참여에 헌신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가능성을 먼 곳에서 찾고자 했지만, 얄궂게도 그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라는 가까운 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와 함께 공동의 참여에 헌신하고자 하는 정신은 억압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 억압된 것이 바로 지금 종교적 근본주의의 탈을 뒤집어쓰고 귀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억압되었던 그 정신이 탈레반의 형상이 아닌, 진정한 해방을 위한 공동 참여의 형상으로 귀환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미 그것은 우리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대규모로 공동의 참여를 수행하며, 이미 익숙해져 있는 쾌락을 희생하는 우리 나름의 순교를 행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계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자신의 쾌락에만 집중하는 개인주의적 ‘자기 배려’를 바꿔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들은, 전문가들의 이른바 객관적 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헌신적인 공동의 참여다. 오직 이것만이 탈레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대응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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