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코르넬리스 더빗, 요한 더빗 형제
“네덜란드 사회에서 이토록 합의가 잘되는 비결이 있습니까?” 한국 방문단이 묻자 네덜란드 공무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비결이 따로 있을까요?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하지 않는 거죠.” 최경호 소장이 전한 2011년의 일화다. 극한 대립 없이 갈등을 풀어가는 네덜란드 사회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옛날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빗 형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형 코르넬리스 더빗은 1667년에 잉글랜드 해군을 물리쳤다. 아우 요한 더빗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치를 개혁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시각에서 보면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평가할 만하지만 그 시대에 중앙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는가 하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주경철). 어떤 이들은 더빗 형제와 생각이 달랐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영웅이던 오라녀 가문에 권력을 몰아주자고 했다. 그때 네덜란드는 정치 갈등이 심했다.
1672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를 쳐들어왔다. 더빗 형제의 외교 정책이 실패한 것이다. 의회는 오라녀 가문의 후계자 빌럼3세에게 비상대권을 넘겼다. 오라녀 가문의 극성 지지자들이 몰려와 더빗 형제를 습격했다. 맞아 죽었달까, 찢겨 죽었달까. 더빗 형제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8월20일의 일이었다. 한때 네덜란드를 이끌던 형제의 시신은 옷이 벗겨진 채 거꾸로 나란히 매달렸다. 형제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내장을 파헤치고 시신을 조각조각 잘라 갔다.
잘라 간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있거니와, 전부 먹어치운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헤이그 역사박물관에 갔을 때 더빗 형제의 미라처럼 딱딱해진 혀와 손가락 마디를 보았다. 오라녀 가문을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반면 델프트 박물관을 가면 모두가 오라녀 가문을 좋아했던 것처럼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오라녀 가문은 지금 네덜란드 왕가의 선조다). 오늘날 네덜란드 사회는 박물관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도 내버려두는 것 같다. 여러 세대 동안 더빗 형제 같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끝에 얻은 지혜일 터이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