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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재정 칼럼] 바이든의 ‘약간의 전략적 인내’

등록 2021-07-26 05:00수정 2021-07-26 09:41

오바마 행정부와 같은 ‘전략적 인내’는 아니고 ‘약간의 인내’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처럼 너무 많이 김정은 총서기를 끌어안는 것은 아니고 약간만 외교를 하겠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과거 미국의 어느 정부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바이든 정부도 웬만하면 현상 유지를 하겠다는 것이다. 70년 넘은 전쟁의 현상과 과감하게 결별하기는 아쉽다는 것일까?

서재정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만나면 반드시 이별하는 것이 섭리인 만큼 이별은 아쉬움을 남긴다. 해서 서정주는 그 아쉬움을 약간의 미련으로 위로한다.

그의 시에서는 윤회의 섭리가 궁극의 구원으로 살아나지만 그 인연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단호함은 없다. 약간의 미련은 고통의 뿌리다. 내일의 불행을 낳는 씨가 될 수도 있다.

국제관계도 비슷하다. 악연은 더 큰 악연을 만들어낸다. 윤회의 업보를 끊어내지는 못하더라도 과거와 단연히 단절하지 못하는 미련이 고통을 재생산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세계 도처에 약간씩의 미련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이티에, 아프가니스탄에, 북한에. 그 미련이 ‘더 좋은 세상’(B3W)을 만들 수 있을까?

지난 23일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는 영면의 길도 평화롭지 않았다. 식장 밖에서는 총성이 울렸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국 대표단은 식이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자리를 피했다. 아예 아이티를 떠나 서둘러서 미국으로 복귀했다.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은 7일 새벽 관저에 침입한 괴한들에게 암살됐다. 이 암살극의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은 오랫동안 묻혀 있을 수도 있다. 아이티 경찰은 미국 플로리다의 아이티계 미국인 크리스티앙 에마뉘엘 사농을 체포했지만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사농이 콜롬비아 용병을 고용해 대통령을 암살했다고 하지만 이들이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오히려 수사를 주도하는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이 의심을 받고 있다. 암살 당시 경호원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대통령 경호 책임자에게도 의혹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다. 마르틴 모이즈 대통령 부인은 장례식장에서 ‘피를 원하는 흡혈귀’가 도처에 있다며 아이티의 지배계급 모두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사실 아이티는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만연한 부패가 문제였다. 모이즈 대통령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트로카리브 펀드에서 20억달러가 사라졌지만 모이즈 대통령은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을 조사하는 대신 이를 방관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나 그는 오히려 공권력으로 이를 억눌렀다. 반면 갱단은 수수방관했다. 가게와 가정집이 불에 타고 길거리는 폭력이 횡행하는 무법지대가 됐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포고령으로 선거를 연기하며 1년 이상 집권을 연장했다. 대통령 퇴진 시위가 빈번한 가운데 정권 전복 시도를 적발했다며 대법관 등을 무더기로 체포하기도 했다. 야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헌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9월 국민투표와 대선을 앞두고 위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 모이즈 대통령이 제거된 것이다.

이 위기 속에서 바이든 정부는 ‘현상 유지’를 택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운 ‘가치외교’는 아이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모이즈 대통령을 굳건히 지지했다. 미국 연방의원들조차 아이티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하며 정책 변경을 촉구했다. 하지만 후안 곤잘레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선임국장은 미국이 과거에도 아이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했다며 “아이티 문제의 해결책은 워싱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르토프랭스(아이티의 수도)에 있다”며 개입에 반대했다. 하지만 개입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이즈 대통령 지지로 현상 유지를 선택한 것이었다.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고 미련을 둔 결과는 모이즈의 암살이었고 더 큰 혼란이었다.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어법도 서정주를 닮았다. 그는 2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8차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 후 “우리는 인내할 것이다. 하지만 많이는 아니고(not much) 약간(some)”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와 같은 ‘전략적 인내’는 아니고 ‘약간의 인내’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처럼 너무 많이 김정은 총비서를 끌어안는 것은 아니고 약간만 외교를 하겠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과거 미국의 어느 정부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바이든 정부도 웬만하면 현상 유지를 하겠다는 것이다. 70년 넘은 전쟁의 현상과 과감하게 결별하기는 아쉽다는 것일까?

물론 바이든 정부의 세계 전략에는 일관된 논리가 있다. 세계 도처에 개입해 힘을 빼는 대신 현상을 유지하며 중국이라는 ‘주적’에 힘을 모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티가 보여주지 않는가. 현상 유지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현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문제의 뿌리를 끊지 않는 한.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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