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3월2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공동행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채윤|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곧 도쿄올림픽이 열린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트랜스젠더 선수가 참여한다. 뉴질랜드 여자 역도 선수 로럴 허버드가 세계 랭킹 7위로 올림픽 출전권을 부여받자 트랜스젠더 여성의 출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허버드 선수가 만약 메달이라도 딴다면 트랜스젠더 여성이 ‘진짜 여자’의 메달을 훔쳤다는 비난이 쏟아질 기세다. 설사 메달을 따지 못한다고 해도 꼬리표는 붙을 것이다. 올림픽은 모든 운동선수에게 꿈의 무대인데 그 기회를 빼앗았다고. 트랜스젠더 여성이 고환 제거 수술을 하고 법적 성별도 바뀌었다 해도 골격이 형성되는 청소년기를 남자로 지냈으므로 신체적으로 유리하다며, 트랜스젠더 여성과 시스젠더 여성(출생신고서에 등록된 성별도 여성이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도 여성인 사람)이 함께 경기를 뛰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근데 이상하다. 언제부터 스포츠 경기에서의 공정함이 모두 똑같은 신체 조건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지?
올림픽에서만 수십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미국의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특별한 신체를 타고난 것으로 유명하다. 손목과 발목의 이중관절, 350㎜ 크기의 발은 특히 수영에 유리하다. 이런 특징이 출전금지 사유가 되기는커녕 그가 얼마나 운명적인 영웅인지 감탄하고 칭송하는 근거가 된다. 게다가 펠프스가 타고난 재능에 기대지 않고 지독할 정도로 성실하게 훈련을 한다며 더 대단하다고 말한다. 특수하게 제작된 비싼 수영복과 다른 나라 선수에 비해 좋은 환경에서 지내도 스포츠의 공정성을 깨고 있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선수가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보지 않고 ‘원래 남자여서’ 잘한다고 말한다. 로럴 허버드가 2018년에 팔꿈치 부상을 입어서 선수 생활이 중단될 뻔했지만 이를 극복한 스토리는 주목받지 못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겠다는 욕심에 남자가 일부러 고환을 제거하고 여자 경기에 출전했다는 식의 악의적인 조롱과 폭언에 시달리지만, 어떻게 이를 견디며 최선을 다하는지는 평가받지 못한다.
올림픽에서 트랜스젠더의 참가가 허용된 것은 2004년부터다. 사람들의 걱정대로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여자 스포츠를 장악해버릴 거라면 왜 이제야 최초의 트랜스젠더 선수가 나오게 된 것일까.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해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모두가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트랜스젠더가 시스젠더에게 진 것을 놀라워하며 보도가 되는 일은 없다. 오로지 이겼을 때만 알려진다. 그리고 불공정하다며 화를 낸다. 결국 불공정이란 시스젠더 여성이 공평하게 스포츠를 즐기거나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시스젠더 여성이 우승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미 수술도 하고,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살고 있음에도 단지 남자였던 때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자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건, 남자의 몸은 여자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고, 여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 타고난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남녀의 차이를 이렇게 본질적으로 규정한 채 트랜스젠더 여성을 조롱하고 비난할 거라면 대체 1973년에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이 남성 윔블던 대회 우승자에게 내민 도전은 어찌 허용했으며, 승리를 축하하고 기념한단 말인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트랜스젠더 참가 요건을 정한 건 ‘누구든 스포츠 경기에 참가하는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올림픽에서 이런 규정이 없다면 트랜스젠더는 그 어떤 스포츠에도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취미로 스포츠 동아리에 들어가려 해도 트랜스젠더가 팀에 있으면 불공정 시비가 생길까 봐 우려된다며 거절당할 수 있다. 올림픽이 배제하면 차별이 합리화된다. 그러니 이건 단지 메달을 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트랜스젠더도 평범하게 일상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트랜스젠더 청소년들도 꿈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