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우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소나기’ 하면 가장 먼저 황순원이 떠오른다. 인터넷 검색에서도 날씨보다 그의 소설이 먼저 검색된다. 그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이제는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잔망스럽다, 처음 배웠던 이 단어는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다.
소나기는 소녀가 소년과 산으로 소풍 가는 장면에 등장한다.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학창 시절 십수번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도 시험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먹장구름, 먹빛으로 까만 비구름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먹구름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을 보랏빛으로 표현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나기를 피하는 데 급급했지, 단 한번도 하늘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다. 어쩌면 먹빛 하늘 어딘가에 보랏빛이 있을지 모른다.
소나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문헌에 등장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표기는 조금 달랐다. ‘쇠나기’로 등장한다. 여기서 ‘쇠’는 ‘몹시’ 혹은 ‘심히’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여기에 한자 ‘날(出)’이 더해졌다. 그러니까 몹시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다른 어원도 몇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소내기’ 어원설이다. 농부들이 소(牛) 내기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뜨거운 여름날, 두 농부 이야기다. 두 농부는 소를 몰고 들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가까운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농부는 먹구름이 비를 내릴 것이라 단언했지만 다른 농부는 이를 부정했다. 언쟁이 심해지다 결국 내기를 하게 된다. 틀린 사람이 맞은 사람에게 소를 주기로. 전 재산을 건 내기다. 결국 먹구름은 세차게 비를 뿌렸고, 이를 예상했던 농부는 소를 얻게 된다.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이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전해진다. 두 농부 대신 농부와 스님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중세 국어 어디에도 ‘소내기’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맞고 틀리고를 떠나 날씨에 이야기를 더한 그 상상력은 여전히 흥미롭다.
올여름엔 어느 때보다 소나기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장마가 늦어지면서 장맛비 대신 소나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6월 한달만 본다면,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서울에 비가 내렸다. 그것도 20~30분간 장대비가 내렸다.
소나기는 매우 단순한 기상 현상이다. 여름철 내리쬐는 햇볕에 지표가 뜨거워지면, 하층 공기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때 상층의 공기가 매우 차가우면 상승 운동이 더욱 활발해진다. 상승하는 공기에 충분한 수증기가 있다면 상층의 차고 건조한 공기를 만나면서 구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비가 내린다. 이 모든 과정은 20~30분 만에 이루어진다. 소설 <소나기>는 이렇게 급격히 발달하는 소나기와 비 갠 하늘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소나기는 보통 지표가 급격히 뜨거워지는 오후나 상층이 급격히 차가워지는 새벽에 주로 발생한다. 하지만 오전이나 저녁에 발생하기도 한다. 반면 장마철에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 장맛비는 보통 장마전선에서 발생하거나 중국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한반도를 관통하면서 발생한다. 그렇다 보니 소나기보다 훨씬 오랫동안 비가 온다. 물론 피해도 크다.
늦깎이 장마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큰 상흔을 남긴 장마, 올해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