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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헌의 바깥길] “죽을 각오”를 권하는 사회

등록 2021-06-22 16:21수정 2021-06-23 09:13

주식시장을 열광시켰던 어느 기업은 노동자들이 ‘죽을 각오’로 일하도록 시스템을 짰다. 그리고 죽는다. 말만 들어도 가슴 뛰게 하는 ‘플랫폼’에는 안전벨트가 없었다. 물류센터에 불이 나고, 20세기 방식으로 소방관들이 몸으로 불을 끈다. 그리고 소방관이 죽는다. 그날, 이 찬란한 기업의 대표는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려 사퇴했다. ‘사즉생’의 요란한 복귀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지금도 나라 걱정에 노심초사 서울 광화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구국의 명장’ 이순신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에게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정좌하고 난중일기를 읽었는데, 술 먹고 토사곽란 한 ‘너무나 인간적인’ 얘기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마치 내가 그와 술이라도 나눠 마신 것처럼 내 속도 쓰렸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 유명한 구절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생즉사 사즉생’) 때문이다.

모함에 빠져 고초를 겪은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벼랑 끝 전투를 하러 가던 길에 그는 백성의 비참한 처지에 가슴 아파했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는 군대에 분개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왕에게 알렸으나, 수백 척의 적군 앞에서 부하들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병사에게 소리친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오자병법의 구절을 인용했다. 도망치면 죽음으로 다스리겠다는 뜻이었다. 별 소용은 없었다. 다음날 적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나가보니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그가 먼저 나서 싸우고 협박하고 달래고 나서야 우리 수군들이 모여들었다. 명량해전의 시작은 이렇게 울퉁불퉁했으나 그 끝은 역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였으니, 그가 포효했던 “죽을 각오”만 역사의 기록에 깊이 남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뭘 해도 ‘죽을 각오’를 한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남들이 ‘죽을 각오’를 하라고 안달복달한다. 전쟁 중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총칼을 쥐지 않는 일상에서도 “사즉생”이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자 장관들을 불러놓고 이순신처럼 말했다. “국가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자세로 위기극복에 임해 달라 … ‘생즉사 사즉생’ 각오가 필요한 때”다. 그렇게 비장하게 임한 경제전쟁의 성과는 어떠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지만, ‘죽을 각오’로 일한 그분들은 안녕했다. 다만, ‘봉사’ 대신에 제 실속 챙기는 일이 많았을 뿐이다. 경제위기 속에서 ‘사즉생’을 주문했던 대통령은 350억원이 넘는 돈을 횡령했다. 옛적에도 그랬다. 전쟁통에도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와서 잡아먹으려고 거짓으로 왜적이 왔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생즉사’를 말했던 이순신은 그들의 “목을 잘라 매달아 널리 보이게 하였다”고 한다. ‘죽을 각오’의 엄정함은 사라지고, 지금은 세월에 윤색된 말만 남았다.

그 이후로 ‘죽을 각오’는 넘쳤다. 어느 지자체 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그 지역의 “경제를 위해 죽을 각오”라고 선언했고, 다른 지자체 후보는 새벽 4시에 ‘이름없는 노동자’를 태우고 가는 6411번 버스를 타고 “서민의 삶을 위해 죽을힘을 다하겠다”고 했다. 또 어느 당 대표에 도전한 후보는 “죽을 각오를 다해서 이길” 것이라고 했다. 어느 청문회에서 후보자는 “죽을 각오로 일하겠다”고 엄숙하게 다짐했고, 어느 현직 시장은 “죽을힘을 다해 빈부격차를 해소”하겠다고 공언했다. 어떤 이들은 서둘러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을 지킬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쥔다.

‘죽을 각오’가 정치적 언사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믿게 하려고 쉴 새 없이 사용한다. 유명 연예인들은 ‘죽을 각오로’ 살을 뺀다고 할 정도다. 15년 전인가 어느 가수이자 화가는 책을 내면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라고 소개했다. 다행히 그가 맞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너나없이 ‘죽을 각오’를 하니, 이제 사회는 ‘죽을 각오’를 권한다. 그래서 국가대표는 항상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어슬렁거리며 필드를 뛰어다니는 것은 사자에게나 허용된 일이지,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순간 사자의 눈을 피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사슴이 되어야 한다. 국가대표가 아니라 ‘태극전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대표하는 산업은행의 대표는 사정이 어려워진 어느 기업에 “죽을 각오로 임하라”고 호통친다.

‘죽을 각오’는 일터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적용된다. ‘죽을 각오’로 공부하란 말을 ‘죽을 만큼’ 듣고 겨우 고만고만한 직장을 얻은 뒤 앞일이 걱정되어 인생지침서를 찾아보면 한결같이 말한다. “서른이면 죽을 각오로 일하라.” 직장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일하라고 하니까, 논리적으로 보면 ‘죽을 각오’가 우선이긴 하겠다. 그러니까 뭔가 제대로 일한다는 것은 죽을 만큼 일하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이자카야 창업자는 한발 더 나아가 “365일, 24시간 죽을 때까지 일하라”고 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가 과로로 죽자, 오랜 논란 끝에 책임을 인정했다. 자신의 ‘경영이념’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 경영이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물 건너 남의 일만은 아니다.

‘죽을 각오’는 수사나 말장난이 아니다. 잠재적으로 온몸의 기운을 다 빼낼 만큼, 영혼까지 끌어내야 제대로 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런 만큼 ‘자신의 노력 탓’의 공간이 늘어난다. ‘죽을힘’에서 멀어질수록 네 처지는 점점 궁색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일하면서 불행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부드러운 숨쉬기와 매끈한 이마 때문이다. 모름지기 ‘일한다는 사람’은 진이 빠지도록 밤새워 일하고, 일터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일터의 ‘사즉생’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를 온전히 일하는 자의 몫으로 내재화시킨다.

따라서 ‘죽을 각오’는 비대칭적이다. 죽을 각오를 하거나 권하는 사람 중 죽은 사람은 드물고, 그런 각오의 ‘압력’ 속에 선택의 여지 없이 묵묵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죽을 각오’로 일하라고 해서 ‘죽을 만큼’ 일하면 소리 내기도 힘들기 때문에 소리 없이 죽는다.

21세기 최첨단 기술과 경영으로 빛나며 주식시장을 열광시켰던 어느 기업은 노동자들이 ‘죽을 각오’로 일하도록 시스템을 짰다. 그리고 죽는다. 말만 들어도 가슴 뛰게 하는 ‘플랫폼’에는 안전벨트가 없었다. 물류센터에 불이 나고, 20세기 방식으로 소방관들이 몸으로 불을 끈다. 그리고 소방관이 죽는다. 그날, 이 찬란한 기업의 대표는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려 사퇴했다. ‘사즉생’의 요란한 복귀다. 그 순간, 길 바깥에 아들 이선호를 잃은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 석자를 대한민국에다 각인시키기 위해 … 길거리에서 죽을 각오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명량해전에서 시퍼런 칼날을 세우던 “사즉생”은 오늘날 시뻘건 탐욕과 뻔뻔한 무책임을 감추는 방패가 되었다. 하릴없이 충무공에게 불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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