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순 |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사업본부장
1989년 11월20일, 제44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전세계 196개국이라는 최다 비준국을 보유한 이 협약은 국제사회 최초로 ‘아동의 권리 보호’만을 위해 제정된 인권 조약으로 우리나라는 1991년 비준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4대 권리인 생존권, 보호권, 발달권, 참여권을 54개 조항에 걸쳐 명시하고 있으며, 아동을 단순 보호 대상이 아닌 존엄성과 권리를 지닌 ‘주체’로 보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출발점은 전쟁이 남긴 극한의 재난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고 많은 고아도 생겨났다. 국제사회는 아이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아동 권리’의 필요성을 느꼈고, 1924년 국제연맹에서 ‘아동의 권리에 관한 제네바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제정된 지 31년을 맞는 올해, 전세계를 다시 한번 재난에 놓이게 만든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아동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4월, 유엔은 ‘코로나19가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189개국이 전국적 휴교령을 내려 약 15억명의 아동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학교 급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던 143개국 약 3억6900만명의 아동들도 극심한 굶주림에 처하게 됐다.
대한민국 아동들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불안정한 일상을 맞게 됐다.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에서 아동과 보호자 6750명을 대상으로 한 ‘아동 재난대응 실태조사’에 따르면, 끼니를 거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아동의 비율은 2018년 49.9%에서 2020년 64.1%로 증가했다. 평일 집에서 보호자 없이 아동 혹은 아동끼리만 있었다고 응답한 아동과 가정 내 아동학대 경험 비율도 증가했다.
지난 8월, 굿네이버스는 아이들과 함께 ‘아동 권리 증진을 위한 아동 참여 토론회’를 열고 아이들의 의견을 국회에 전달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토론회에 참가한 아동들은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는 아동 맞춤 정보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아동의 놀 권리에 주목하는 어른이 많아지면 좋겠다” “온라인 수업으로 인한 교육 격차 해소가 필요하다” 등 아동만의 생생한 시각이 담긴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지난해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유엔아동권리협약 제5·6차 국가보고서 심의 현장에서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 정부에 ‘아동 참여’를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 굿네이버스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이들 편에서 들어주세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아동 청원’ 게시판도 운영해 아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19로 침해된 아이들의 권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1차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아동 권리에 눈을 떴던 것처럼,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19를 계기로 아동 권리를 보장하는 데 부족한 점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아동을 사회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으로서 대우하고, 아동 관련 정책에 당사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