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 동맹군에 패해 영광이 명멸해가던 시기에 살았다. 아테네 사람들은 굴욕적인 패배에서 벗어나 안정을 추구하려 했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실행하던 아테네 최대의 적인 군국주의 스파르타의 체제를 직간접적으로 찬양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되어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게 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근거의 하나다.
그러나 자세히 살핀다면 그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아테네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 때문에 죽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도덕함이 아테네의 전반적인 기조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 시기 그리스 도처에 만연하던 ‘힘이 정당성을 만든다’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듯 그는 ‘등에’가 되어 아테네를 성가시게 했다. 그는 올바름을 생각하고 선을 추구하라고 정의감을 부추기며 그 시민들을 괴롭혔다. 등에에게 돌아온 것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정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고발이었다.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은 고발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임종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변론을 도전적으로 펼쳤다고 전한다. 목적을 갖고 행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맞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결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유죄 평결로 사형을 맞게 되었다. 간수를 매수한 친지들이 외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꾸며놨고, 고발자들마저 그가 달아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도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증거일 뿐이고, 진정한 철학자는 그런 두려움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죽어야 할 시간이 왔다”며 죽음을 택했다. 자신의 죽음이 아테네의 불행을 구제할 처방임을 암시하듯, 헴록을 마신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제물을 바쳐달라는 것이었다.
의롭게 죽어 영원히 살아있는 누군가가 그립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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