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찍지 말걸 그랬어 오래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 보러 갔습니다. 대통령님은 이쁘게 찍어 달라고 하시며 브이(V)자를 지으셨습니다. 조만간 한 번 더 뵈러 가야지 가야지 하다 … 토요일, 그냥 울었습니다. 차라리 찍지 않았으면 이렇게 미안하지 않을 텐데…. 그 미소가 울게 합니다. 그 마음이 세상을 울렸습니다. 가시는 길에 부디 모든 걸 놓고 가소서. 우리 곁에서 편히 잠드소서. 윤순영/부산 남구 용호1동
차라리 찍지 말걸 그랬어
오래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 보러 갔습니다. 대통령님은 이쁘게 찍어 달라고 하시며 브이(V)자를 지으셨습니다. 조만간 한 번 더 뵈러 가야지 가야지 하다 … 토요일, 그냥 울었습니다. 차라리 찍지 않았으면 이렇게 미안하지 않을 텐데…. 그 미소가 울게 합니다. 그 마음이 세상을 울렸습니다. 가시는 길에 부디 모든 걸 놓고 가소서. 우리 곁에서 편히 잠드소서.
윤순영/부산 남구 용호1동
‘왕의 위협’에 죽음으로써 안전지대 갖게 된 이순신 김훈 <칼의 노래>를 읽은 노 대통령
유서의 선행 텍스트가 아닐까
왕은 이순신을 두려워했기에
그는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칼의 노래>가 이순신이 사지(死地)를 찾는 여정의 서사였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이 소설을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의 선행 텍스트로 읽는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이순신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는 왕으로부터 ‘면사첩’(免死帖)을 받은 죄인이다. 면사첩은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에게는 ‘면사’라는 말조차 거두어져야만 삶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왕이 이순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 그는 청렴했기 때문에 그 이전 대통령들처럼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했고, 그는 강직했기 때문에 이전 대통령들처럼 수사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기 때문에 괴로웠고, 그 괴로움은 엠비(MB)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권이 현 대통령은 불편하다. 현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잉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시작되었다. 청렴 노무현의 비리 의혹. 그 모순에 대해 마치 엠비는 봉하마을에 위리안치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가족들을 다 소환하고, 12시간을 심문하고, 그의 가족사를 파렴치한의 그것으로 서사화하였다.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목소리는 짙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부끄러움은 마침내 ‘사지’를 찾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나서 오히려 국민들의 선호도가 높아졌다. 그것은 분명 현 정권에 불편한 일이다. ‘전 대통령의 현존’이 ‘현 대통령의 부재감’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엠비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시이오(CEO)의 이미지가 강했고, 정치가라기보다는 경제전략가에 가까웠는데, 그 경제조차 지지부진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엠비에게 어떤 위협이었을까.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없었던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엠비에 의해 정치적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그가 말한 대로 ‘운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사였다. 어쩔 수 없는 궁극의 사북에서의 죽음. 유년의 원형이 간직된 봉하마을 뒷산에서의 투신. 그것이 어떻게 그저 자살일까. 다시 한 번, 이순신의 죽음을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이루시기를 기원한다. 이순신은 왕의 위협에 대해 죽음으로써 비로소 안전지대를 갖게 되었다. 그의 ‘사지’는 그래서 탈주지였던 것. 한귀은/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
“노무현이가 대통령 되면 혁명이겠지요?” 광주 경선 때 적극 지지하는 광고를 냈다
혁명일 거라 여겼던 그가 대통령이 됐다
한나라 집권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모든 걸 살리려 목숨을 내놓았다 2000년인가 지금은 고인이 된 윤한봉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노무현씨가 왔으니 함께 아침을 먹자고 했다. 금남로3가에 있는 무등산이라는 식당에서 예닐곱명이 추어탕을 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지없는 촌놈 모습에 순한 눈빛이 좋았다. 헤어져 오는 길에 한봉씨가 나더러 “형님,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되면 혁명이겠지요?”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에 나설 민주당 후보 경선 때다. 노무현씨가 제주도에서 2등인가 하고 나서 광주에서 경선을 할 차례였다. 광주 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광주 선후배들이 줄곧 모여서 고민을 거듭했다. 노무현씨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신문에 의견광고를 내기로 했다. 실력 있는 후배가 초안을 잡았다. 내가 밤에 그 원고를 손보았다. 다음날 아침 글쟁이들과 다방 귀퉁이에 앉아서 원고 검토를 마쳤다. ‘아름다운 바보, 그를 믿습니다’라는 광고글이 한겨레신문에 8단 통으로 실렸다. 선거인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극적으로 노무현씨가 광주 경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광고가 내 이름으로 나간 탓에 서울 검찰청에 불려가 7시간 조사를 받고 재판에서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선거법 위반 선고로 각각 300만원 벌금을 물고 나는 5년간 공민권(투표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우리가 내심 기대한 만큼 혁명가는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을 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교육혁명, 비정규직 문제 해결, 서울 아파트값 내리기 등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500만명이 몰려 사는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려 무진 애를 쓰고 남북 화해와 상생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싫었다가 좋았다가 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 지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후퇴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남북 사이도 끊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수뢰죄를 뒤집어씌우려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증거를 대라 했다. 불구속 상태든 구속 상태든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되고,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부인과 자식들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민주세력이 몰락하게 되어 있었다. 피울음을 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처럼, 조성만 열사처럼,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예수도 죽기 전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드렸다. 노무현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였다. 자기 사람들(‘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목격하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말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노무현이 예수처럼 목숨을 바쳐서 다시 살아날(부활할) 길, 살길을 열어놓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길을 가야 하듯이 우리 국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어놓은 길을 가야 한다. 온 국민, 온 겨레가 골고루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 김수복/일과놀이 출판사 대표
그의 죽음으로 나의 청춘은 끝났다 시청 잔디밭만 밟아도 빨간줄 그어질 것 같다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는 꿈을 꾸며 살 만한 곳일까
국민 대통령과 훗날 막걸리 한잔 하고 싶었건만 대학의 한 은사님께서 술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광석이 죽으면서 내 청춘은 끝났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이른바 386세대인 교수님에게 청춘은 무엇이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단지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의 자살이 교수님께 큰 충격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교수님의 ‘나의 청춘이 끝났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돼’를 되뇌며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인 24일에 찾아간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조문객 수만큼 많은 경찰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의 잔디밭만 밟아도 바로 연행되어 내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 놓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란 게 있는 걸까. 난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임을 믿고 젊음을 누리며 꿈을 꾸며 살아왔다. 몰상식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 행동 등을 보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해왔다. 비주류가 숨을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고 이 세상은 강자가 약자에게 양보하고 주류가 비주류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내가 지금껏 바라왔던 꿈, 희망, 나의 청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은 조금은 다른 정치인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정치인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원칙이나 소신이 보였다. 나는 그를 통해 확고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과 같이 먼 훗날에 ‘이쯤 되면 이제 좀 살 만해진 것 같지요’라며 막걸리 한잔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내 꿈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젊기에 품을 수 있는 희망이 이제 힘을 잃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직 희망이잖아요. 아직은 이 사회에 희망은 있어요. 내가 한번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지요.’ 이제 더는 이 말은 내 목소리에서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교수님이 하셨던 청춘이 끝났다는 말과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김광석의 노래 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시절 내내 외친 변화와 개혁을 이제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까. 이제 그 누가 나에게 희망을 이야기해 주고 끝나버린 청춘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줄까. 이경은/서울 성동구 행당1동
봉하마을에서 만난 동서남북 민초들! 월요일, 봉하에 다녀왔다. 전날 저녁, 지나가는 뉴스에서 부엌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미리 고무장갑을 챙겨 넣었다. 부엌일은 다른 분들께 뺏기고(?) 방명록 글 받는 일을 교대했다. 창원에서 버스 타고 땀 뻘뻘 흘리며 혼자 오신 할머니,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비고란에 짧은 글을 남기지 못하셨다. 경주에서 온 새댁, 4학년짜리 아들을 앞세우고 갓난아기 업고 새벽차 타고 숨 몰아쉬며 연신 땀을 닦아냈다.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 글 남기겠느냐고 물으니 일요일 와서 길에서 자고 다시 온다며 초췌한 모습으로 헛도는 웃음을 짓는다. 전주에서 왔다는 두 청년,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단다. 아, 여기에 내가 만났던 그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이 모자라는 솜씨로 어찌 다 남길 수 있겠냐마는, 언제나 그래 왔듯 크고 화려하고 유명짜한 일들에 묻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물론 알리려고도 않는, 지금 대한민국 남쪽에서 뜨거운 봄날 일어난 이야기를, 그냥 내 가슴속에만 묻을 수 없었다. 전남 신안에서, 경북 안동에서, 동서남북을 넘나드는 이 물길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인위적으로 보를 쌓아 막는다면 언젠가는 터져버려 큰 물난리를 겪고 말리라. 서혜란/부산 사하구 신평2동
민중이 무너졌다…‘서거’보다 ‘민붕’을 노무현 대통령! 그는 많은 걸 주고 떠나갔다. 기득권 세력에는 당당하고 도발적인 언행으로 각인돼 있을지라도, 우리 서민들에겐 늘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떠나갔으니 시름 많은 서민들은 얼마나 애통하고 서럽겠는가! 그런데 언론에서는 ‘서거’(逝去)라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표현을 서민 대통령에게 붙이고 있다. 서거는 훙서(薨逝)와 훙거(薨去)란 단어에서 앞의 훙이란 말이 빠지고 서거만이 그 뜻을 대체한 것인데, 황제나 귀족과 같은 계급적 말이다. 서민을 대표하고 권위주의 타파를 내세웠던 대통령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민중의 사랑을 담은 ‘애상’(愛喪) 혹은 민중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뜻의 ‘민붕’(民崩)이라고 쓰기를 제안한다. 최승호/경북 안동시 송천동
여린 촛불 하나 용납 못하는 당신들 26일 저녁 아내와 함께 서울 덕수궁 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했다. 3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당신이 가고 난 자리가 이렇게 큰데 …. 애통한 마음을 뒤로하고 촛불을 밝힌 채 조선일보사 앞을 지날 때였다. 경찰이 촛불을 끄라며 에워쌌다. 영문을 몰라 물었다. 왜 촛불을 끄라고 하냐고, 왜 우리를 에워싸고 겁을 주냐고. 동화면세점 앞에 도착했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경찰들이 중학생들과 할아버지 한 분을 에워싸고 촛불을 끄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구호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여린 촛불은 경찰의 손에 강취당하고, 이내 생명을 다해버렸다. 멍하니 숨죽여 내뱉은 할아버지의 몇 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너희가 대한민국 경찰이냐, 대통령 보내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냐.” 남요현/서울 강서구 공항동
‘왕의 위협’에 죽음으로써 안전지대 갖게 된 이순신 김훈 <칼의 노래>를 읽은 노 대통령
유서의 선행 텍스트가 아닐까
왕은 이순신을 두려워했기에
그는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칼의 노래>가 이순신이 사지(死地)를 찾는 여정의 서사였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이 소설을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의 선행 텍스트로 읽는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이순신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는 왕으로부터 ‘면사첩’(免死帖)을 받은 죄인이다. 면사첩은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에게는 ‘면사’라는 말조차 거두어져야만 삶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왕이 이순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 그는 청렴했기 때문에 그 이전 대통령들처럼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했고, 그는 강직했기 때문에 이전 대통령들처럼 수사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기 때문에 괴로웠고, 그 괴로움은 엠비(MB)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권이 현 대통령은 불편하다. 현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잉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시작되었다. 청렴 노무현의 비리 의혹. 그 모순에 대해 마치 엠비는 봉하마을에 위리안치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가족들을 다 소환하고, 12시간을 심문하고, 그의 가족사를 파렴치한의 그것으로 서사화하였다.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목소리는 짙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부끄러움은 마침내 ‘사지’를 찾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나서 오히려 국민들의 선호도가 높아졌다. 그것은 분명 현 정권에 불편한 일이다. ‘전 대통령의 현존’이 ‘현 대통령의 부재감’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엠비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시이오(CEO)의 이미지가 강했고, 정치가라기보다는 경제전략가에 가까웠는데, 그 경제조차 지지부진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엠비에게 어떤 위협이었을까.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없었던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엠비에 의해 정치적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그가 말한 대로 ‘운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사였다. 어쩔 수 없는 궁극의 사북에서의 죽음. 유년의 원형이 간직된 봉하마을 뒷산에서의 투신. 그것이 어떻게 그저 자살일까. 다시 한 번, 이순신의 죽음을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이루시기를 기원한다. 이순신은 왕의 위협에 대해 죽음으로써 비로소 안전지대를 갖게 되었다. 그의 ‘사지’는 그래서 탈주지였던 것. 한귀은/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
“노무현이가 대통령 되면 혁명이겠지요?” 광주 경선 때 적극 지지하는 광고를 냈다
혁명일 거라 여겼던 그가 대통령이 됐다
한나라 집권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모든 걸 살리려 목숨을 내놓았다 2000년인가 지금은 고인이 된 윤한봉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노무현씨가 왔으니 함께 아침을 먹자고 했다. 금남로3가에 있는 무등산이라는 식당에서 예닐곱명이 추어탕을 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지없는 촌놈 모습에 순한 눈빛이 좋았다. 헤어져 오는 길에 한봉씨가 나더러 “형님,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되면 혁명이겠지요?”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에 나설 민주당 후보 경선 때다. 노무현씨가 제주도에서 2등인가 하고 나서 광주에서 경선을 할 차례였다. 광주 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광주 선후배들이 줄곧 모여서 고민을 거듭했다. 노무현씨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신문에 의견광고를 내기로 했다. 실력 있는 후배가 초안을 잡았다. 내가 밤에 그 원고를 손보았다. 다음날 아침 글쟁이들과 다방 귀퉁이에 앉아서 원고 검토를 마쳤다. ‘아름다운 바보, 그를 믿습니다’라는 광고글이 한겨레신문에 8단 통으로 실렸다. 선거인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극적으로 노무현씨가 광주 경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광고가 내 이름으로 나간 탓에 서울 검찰청에 불려가 7시간 조사를 받고 재판에서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선거법 위반 선고로 각각 300만원 벌금을 물고 나는 5년간 공민권(투표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우리가 내심 기대한 만큼 혁명가는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을 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교육혁명, 비정규직 문제 해결, 서울 아파트값 내리기 등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500만명이 몰려 사는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려 무진 애를 쓰고 남북 화해와 상생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싫었다가 좋았다가 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 지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후퇴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남북 사이도 끊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수뢰죄를 뒤집어씌우려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증거를 대라 했다. 불구속 상태든 구속 상태든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되고,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부인과 자식들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민주세력이 몰락하게 되어 있었다. 피울음을 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처럼, 조성만 열사처럼,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예수도 죽기 전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드렸다. 노무현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였다. 자기 사람들(‘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목격하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말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노무현이 예수처럼 목숨을 바쳐서 다시 살아날(부활할) 길, 살길을 열어놓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길을 가야 하듯이 우리 국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어놓은 길을 가야 한다. 온 국민, 온 겨레가 골고루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 김수복/일과놀이 출판사 대표
그의 죽음으로 나의 청춘은 끝났다 시청 잔디밭만 밟아도 빨간줄 그어질 것 같다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는 꿈을 꾸며 살 만한 곳일까
국민 대통령과 훗날 막걸리 한잔 하고 싶었건만 대학의 한 은사님께서 술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광석이 죽으면서 내 청춘은 끝났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이른바 386세대인 교수님에게 청춘은 무엇이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단지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의 자살이 교수님께 큰 충격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교수님의 ‘나의 청춘이 끝났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돼’를 되뇌며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인 24일에 찾아간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조문객 수만큼 많은 경찰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의 잔디밭만 밟아도 바로 연행되어 내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 놓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란 게 있는 걸까. 난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임을 믿고 젊음을 누리며 꿈을 꾸며 살아왔다. 몰상식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 행동 등을 보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해왔다. 비주류가 숨을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고 이 세상은 강자가 약자에게 양보하고 주류가 비주류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내가 지금껏 바라왔던 꿈, 희망, 나의 청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은 조금은 다른 정치인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정치인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원칙이나 소신이 보였다. 나는 그를 통해 확고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과 같이 먼 훗날에 ‘이쯤 되면 이제 좀 살 만해진 것 같지요’라며 막걸리 한잔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내 꿈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젊기에 품을 수 있는 희망이 이제 힘을 잃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직 희망이잖아요. 아직은 이 사회에 희망은 있어요. 내가 한번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지요.’ 이제 더는 이 말은 내 목소리에서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교수님이 하셨던 청춘이 끝났다는 말과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김광석의 노래 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시절 내내 외친 변화와 개혁을 이제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까. 이제 그 누가 나에게 희망을 이야기해 주고 끝나버린 청춘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줄까. 이경은/서울 성동구 행당1동
봉하마을에서 만난 동서남북 민초들! 월요일, 봉하에 다녀왔다. 전날 저녁, 지나가는 뉴스에서 부엌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미리 고무장갑을 챙겨 넣었다. 부엌일은 다른 분들께 뺏기고(?) 방명록 글 받는 일을 교대했다. 창원에서 버스 타고 땀 뻘뻘 흘리며 혼자 오신 할머니,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비고란에 짧은 글을 남기지 못하셨다. 경주에서 온 새댁, 4학년짜리 아들을 앞세우고 갓난아기 업고 새벽차 타고 숨 몰아쉬며 연신 땀을 닦아냈다.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 글 남기겠느냐고 물으니 일요일 와서 길에서 자고 다시 온다며 초췌한 모습으로 헛도는 웃음을 짓는다. 전주에서 왔다는 두 청년,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단다. 아, 여기에 내가 만났던 그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이 모자라는 솜씨로 어찌 다 남길 수 있겠냐마는, 언제나 그래 왔듯 크고 화려하고 유명짜한 일들에 묻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물론 알리려고도 않는, 지금 대한민국 남쪽에서 뜨거운 봄날 일어난 이야기를, 그냥 내 가슴속에만 묻을 수 없었다. 전남 신안에서, 경북 안동에서, 동서남북을 넘나드는 이 물길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인위적으로 보를 쌓아 막는다면 언젠가는 터져버려 큰 물난리를 겪고 말리라. 서혜란/부산 사하구 신평2동
민중이 무너졌다…‘서거’보다 ‘민붕’을 노무현 대통령! 그는 많은 걸 주고 떠나갔다. 기득권 세력에는 당당하고 도발적인 언행으로 각인돼 있을지라도, 우리 서민들에겐 늘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떠나갔으니 시름 많은 서민들은 얼마나 애통하고 서럽겠는가! 그런데 언론에서는 ‘서거’(逝去)라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표현을 서민 대통령에게 붙이고 있다. 서거는 훙서(薨逝)와 훙거(薨去)란 단어에서 앞의 훙이란 말이 빠지고 서거만이 그 뜻을 대체한 것인데, 황제나 귀족과 같은 계급적 말이다. 서민을 대표하고 권위주의 타파를 내세웠던 대통령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민중의 사랑을 담은 ‘애상’(愛喪) 혹은 민중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뜻의 ‘민붕’(民崩)이라고 쓰기를 제안한다. 최승호/경북 안동시 송천동
여린 촛불 하나 용납 못하는 당신들 26일 저녁 아내와 함께 서울 덕수궁 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했다. 3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당신이 가고 난 자리가 이렇게 큰데 …. 애통한 마음을 뒤로하고 촛불을 밝힌 채 조선일보사 앞을 지날 때였다. 경찰이 촛불을 끄라며 에워쌌다. 영문을 몰라 물었다. 왜 촛불을 끄라고 하냐고, 왜 우리를 에워싸고 겁을 주냐고. 동화면세점 앞에 도착했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경찰들이 중학생들과 할아버지 한 분을 에워싸고 촛불을 끄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구호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여린 촛불은 경찰의 손에 강취당하고, 이내 생명을 다해버렸다. 멍하니 숨죽여 내뱉은 할아버지의 몇 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너희가 대한민국 경찰이냐, 대통령 보내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냐.” 남요현/서울 강서구 공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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