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벽에 3학년 학생이 추모의 쪽지를 붙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김장균 | 서울공진초등학교 교장
나는 분노한다. 작금의 학교 현장을 보면서 그동안 줄기차게 외쳐왔던 교육개혁은 무엇이고 학교혁신은 무엇이었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개혁과 혁신을 통해 교육 환경은 좋아지고 교육의 질적 수준은 높아졌는가? 무엇을 위한 개혁이고 혁신이었는가? 학생들과 교사가 안전한 시설과 교실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학습하는 가운데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학교혁신의 본질이다. 아쉽게도 교육개혁과 학교혁신은 교사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와 교육행정가들의 포장지였음을 우리는 교실 현장을 보면서 확인한다.
유능한 인재들이 사명감으로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만나는 학교 현장에서 왜 교사는 학생에게 폭행당하고, 학부모에게 머리채를 잡히며, 고소·고발당해야 하는가? 교실은 붕괴하고 상처받은 교사들은 병가와 질병 휴직에 내몰리며 심지어 교직을 던지고 학교를 떠나거나 극단적 선택으로 사회에 마지막 경종을 울린다. 이제 학교혁신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황폐화되어 버린 지 오래인 교실 현장을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는 환경으로 바꾸는데 모든 행정·재정적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혁신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제 사람에게 투자하자. 겉만 번지르르한 교육 환경 개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시설 투자, 디지털 교실 구축도 필요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학급당 학생 수에 따른 학습 보조사 지원이 필요하다. 학급당 학생 수를 이야기할 때 흔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학급당 학생 수와 비교하는 데 이는 통계로서는 유용할지 모르나 현장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통계이다. 학급당 10명 내외의 학급이 있는가 하면 30명이 넘는 학급도 많다. 그러나 둘 다 한 명의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교사들은 학습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 생활지도가 훨씬 힘들다고 말한다. 생활지도가 힘들어서 학생이 한 명만 많아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사들이 30명이 넘는 교실에서 혼자 학생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학급을 운영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다. 학급편성의 기준이 되는 학생 수를 초과하는 학급에는 학습을 돕고 생활지도를 도와주는 학습 보조사를 배치하자. 이미 초등 1, 2학년의 학습을 돕는 기초학력협력강사, 또는 학습 튜터들에 대한 교사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이를 확대 개편해서 학급당 인원수를 기준으로 배치하면 기초학력 향상, 생활지도, 교사의 수업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학부모 책임성 강화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학부모들도 학교 교육에 간접적으로 많이 참여한 때가 있었다. 교통지도, 급식 참여, 도서실 명예 교사, 안전 지킴이 활동 등으로 학교 교육 활동에 참여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학교와 소통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제 이런 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 학부모가 학교 교육을 이해하고 소통할 기회가 매우 적다. 오히려 학부모는 자녀를 학교에 맡겨놓고 학교나 교사를 감시하는 감시자로, 작은 불편에도 민원을 통해 교사를 괴롭히는 민원인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라고 교사들은 한탄하고 있다. 학부모가 학교를 이해하는 가운데 자녀들의 성장을 돕고 학부모들도 함께 성장하는 학부모교육을 강화해서 학부모도 보호자로서의 책임성을 강화하도록 하자.
셋째, 지치고 상처받은 교사들의 심신을 회복해주는 기능을 확대하자. 학교폭력이나 악성 민원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교사들을 위해 잠시라도 학교를 벗어나 심신을 회복할 기회를 확대하자. 필요하면 치유센터라도 만들어서 재충전을 통해 학교로 복귀해서 건강한 정신으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학교폭력 관련 법률이나 아동학대 범죄 관련 법률의 개정이 필요하다. 법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예방하고 공정한 해결을 돕는 데 목적이 있지만 최소한 학교 현장에서는 이 두 가지 법이 학교의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보다 갈등을 조장하고 학교 교육을 더 힘들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선 학교폭력의 대상과 범위를 좁혀서 학교의 교육적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학생의 잘못을 나무라며 꾸중만 해도 아동학대라고 신고하면 경찰서에서 조사받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교사의 학생 생활지도 기능은 이미 마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교사 교육적 권위는 무너지고 생활지도 수단이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참된 교육을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