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오준|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이사장
2013년 가을, 친구들과 소풍을 가고 싶다던 8살 윤주(가명)는 엄마에게 맞았다. 머리와 가슴을 주먹으로 맞고 발에 차였는데,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끝내 숨졌다. 그 전해에도 집에 늦게 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아서 허벅지 뼈가 부러진 적이 있다. 또 어느 날엔 엄마가 부은 뜨거운 물 때문에 손과 발에 2도 화상을 입었다. 윤주는 학교에서 밝은 성격이었다. 가끔 얼굴에 있는 멍 자국에 대해 물어보면 ‘집에서 다쳤다’고 말할 뿐 엄마의 폭력을 알리지 않았다. 학교도 이웃도 어느 누구도 학대를 의심하지 않았다.
2020년 가을, 생후 16개월의 소원(가명)이는 입양된 지 8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쳤다. 혼자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병원에 실려 온 아이의 머리와 배에 큰 상처가 있었다. 병원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이는 그날 오후에 숨졌다. 소원이가 다니던 어린이집과 병원, 그리고 지인의 아동학대 신고가 그 전에도 몇차례 있었지만, 신고를 받은 경찰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가정을 방문한 입양기관도 양부모의 해명을 믿었다.
2014년 이후 217명의 아이들 삶이 짧고 슬픈 기록으로 끝났다. 한명 한명 모두 의미 있는 존재였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수많은 허점은 그들이 떠난 후 드러났다. 전문가의 손길이 못 미쳤거나, 안이한 판단으로 돌려보내선 안 될 곳에 돌려보냈거나, 늦은 대응으로 아이를 살릴 기회를 놓친 경우도 많았다. 같은 해 아동학대처벌법이 시행된 후 정부의 아동학대 대책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아동학대와 학대로 인한 사망 사건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작년 한해에 발생한 아동학대 건수만 3만여건으로, 하루 평균 85명의 아동이 학대를 받고 있다.
아동학대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우리는 모두 슬퍼하고 분노한다. 하지만 슬픔과 분노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성찰하고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 어른의 의무다.
그런 뜻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학대를 기록한 온라인 아카이브 ‘대한민국 아동학대, 8년의 기록’과 사례집 ‘문 뒤의 아이들’을 만들었다. 지난 8년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을 기억하고 학대 피해 아동의 회복과 제도 개선에 관심을 모으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중요한 아동학대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런 일이 왜 일어났으며 법과 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지 찾아내려는 노력을 담았다. 그 가운데 아동학대 82%가 가정에서 일어나며, 우리 모두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보편성도 다시 깨달았다. 가정에 있는 아이들이 안전할 것이라는 안이한 믿음만으로는 아동학대로부터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함께 지니는 것이다.
11월19일은 아동학대 예방의 날이다. 전세계에서 아동학대 문제를 조명하고 폭력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우리나라는 2012년 아동복지법을 개정한 후 아동학대 예방주간과 아동학대 예방의 날을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한 20일은 한국이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에 가입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영국의 사회개혁가 에글렌타인 젭이 작성한 아동권리선언문에서 출발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만 18살 미만의 아동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생존과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 세대인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약속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아동학대를 완전히 퇴치한다는 목표를 갖고, 일시적인 사회의 관심과 분노를 넘어 아동보호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그러려면 아동보호와 관련한 모든 결정 과정에 아동 이익 우선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아동의 목소리와 도움 요청을 아동의 방식으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코로나19 비상상황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른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안전하게 보호받는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동이었고,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되새길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