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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내용이 ‘국위 선양’에 묻혀
대중 열광 배경엔 콤플렉스가 작용 지난주 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에 대한 비평을 썼다가 엄청난 악플에 (가상)몰매까지 맞았다. “웃자고 만든 건데 죽자고 달려든다”, “왜 대중문화를 대중문화로 보지 못하냐”,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될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 수도 없었다. 우선, 죽자고 달려든 건 내가 아니라 1만개에 가까운 악플을 남기신 그분들이 아닌가 싶다. 또 왜 그분들이야말로 비평을 비평으로 보지 못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보기 싫으면 보지 마라”라는 분들에게 나도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고 싶다. “읽기 싫으면 읽지 마세요.” 내가 제기한 것은 세 가지였다. 그 첫째는 가족은 둘째 치고 친구와도 함께 보기 민망한 선정성인데, 내가 정작 비판하고자 했던 부분은 다른 두 가지다. 우선 반복되는 여성 학대다. 여성이 커피 마시는데 잔을 툭 치고, 여성이 앉는 것을 도와주는 척하다가 의자를 빼버리고, 그래서 쓰러진 여성을 이번엔 정형돈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는 척하다 내동댕이친다. 외국에선 “끔찍”, “싸구려 저질”, “역겹다”는 의견과 함께 여성 학대라는 평도 많다. 여성을 처박아 놓고 배를 잡고 신나게 웃는 남성 패거리의 모습에서 약자를 괴롭혀 쾌감을 얻는 가학성마저 엿보인다. 사실 선정성은 내 관심 밖이다. 나는 과거 김인규 교사의 나체사진이나 최근 박경신 교수의 표현의 자유 주장에 120% 동의한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수준을 넘어 약자인 여성을 장난의 대상으로 여기고 학대를 반복하며 노리개로 삼는 것에는 당연히 반대한다. 그런 면에서 젠틀맨은 ‘저질 마초 문화’보다도 저질이다. 셋째는 ‘사디즘적 포르노그래피 한류’에 온 국민과 언론이 열광하며 집단적으로 ‘응원하자’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건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마초 비(B)급 문화에 열광하는 국민, 유튜브 클릭 수를 세며 생중계하는 언론, 빌보트차트 등수가 국격을 결정하는 (줄 아는) 나라….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국외 진출, 국위 선양이면 양잿물도 마시는가. 많은 이들은 에미넴, 스눕독, 비욘세, 레이디 가가의 뮤직비디오가 훨씬 야하다고 반박했다. 맞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이들의 신곡이 나왔다 해서 그 나라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응원하고 언론이 릴레이 중계하고 외국 차트 1위에 오르길 염원하나. 그래서 미합중국 국민들은 레이디 가가를 자랑스러워하나. 또 많은 이들이 싸이는 비급 문화 아티스트라며 ‘보호’한다. 세상에 어느 비급 문화가 와이지엔터테인먼트 같은 거대 기획사의 뒷받침을 받으며 방송 출연도 골라 하고 서울시의 배려로 서울광장에서 3만~4만명을 끌어모아 단독 콘서트를 하는가. 어느 비급 아티스트가 1년에 수백억원을 버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랜 콤플렉스로부터의 탈출이다. 우리가 근대 콤플렉스, 서구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과거 황우석 교수나 심형래 감독 사례에서 나타난 거국적 촌극은 반복될 것이고 박지성·김연아·세계야구클래식(WBC)에서 보는 민족적 ‘자뻑’은 계속될 것이며, 또 하인스 워드나 아키야마 요시히로(추성훈)의 사례에서 보듯 외국에서 성공하니까 갑자기 돌변하여 ‘한국인의 피’라고 떠받드는 민망스러움은 영원할 것이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대 교수
싸이는 국가대표가 아니다 ‘젠틀맨’은 신사다움에 대한 풍자·조롱
애국주의 비판은 대중을 얕보는 것
싸이 현상의 핵심은 벽 뚫는 무국적성 싸이 열풍은 과연 무비판적 애국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일까. 혹자는 ‘젠틀맨’이 빌보드 차트 5위에 진입하고, 유튜브 조회 수가 2억건을 넘어서는 등 외국에서 열풍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선정성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실종됐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 노래는 전혀 한국적이지 않으며, 미국 문화를 그대로 차용했기에 그 애국주의적 열풍 자체가 대중들의 미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싸이는 한류 전도사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 문화의 첨병이라는 것이다. 얼핏 문화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접근을 비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그 이야기는 내셔널리즘으로 귀착된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애국주의 논쟁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참 수준에 못 미치는데도 마치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인 양 홍보되면서 700여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하지만 ‘젠틀맨’을 <디 워>와 비교하는 건 어딘지 억울하다. ‘젠틀맨’은 음악으로나 영상으로나 꽤 괜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셔널리즘과 상관없는 외국 반응으로 입증된다. <디 워>가 미국에서 참패한 것과 달리, ‘젠틀맨’은 외국 팬들에게 열광적 반응을 얻고 있다. 외국 팬들이 열광하기 때문에 우리도 부화뇌동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중을 수준 이하로 보는 게 아닐까. 심지어 ‘포르노 한류’라고까지 표현하는 주장에는 무비판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내셔널리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를 대표한다는 한류에 포르노적 선정성이 있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젠틀맨’을 내셔널리즘적 관점으로 보기에 생기는 이율배반이다. 실력이 뛰어난 국가대표를 뽑았는데 그가 정작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반항기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불편해질 수밖에. ‘젠틀맨’ 뮤직비디오가 도발적인 건 단지 하체를 좌우로 흔들며 시건방춤을 추거나, 마네킹 가슴을 만지고, 의자를 빼 여자를 넘어뜨린다거나, 가인이 야릇한 포즈로 어묵을 먹는 장면이 있어서가 아니다. 진짜 도발은 ‘젠틀맨’에 대한 혐오와 모욕이다. 신사라면 응당 예의를 차려야 할 텐데 싸이는 그 정반대다. ‘동방예의지국’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런 도발은 불편하다. ‘젠틀맨’은 단순히 유쾌한 풍자가 아니라 포르노에 가깝고, 그것이 담고 있는 게 우리 것이 아니라 미국 문화라는 지나치게 엄숙한 시각은 싸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데 그를 국가대표로, 그의 음악을 국가대표 상품으로 보는 시각에서 만들어진다. 싸이라는 문화 현상의 핵심은 내셔널리즘의 벽을 뚫는 무국적성에서 비롯한다. 싸이의 음악은 국가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다. 거기에서 배타적 국적성은 소멸하고 코즈모폴리턴적 다양성이 생겨난다. 춤동작 하나로 국가를 넘어 똑같이 즐거울 수 있다는 건 놀랍지 않은가. 따라서 싸이의 음악에 내셔널리즘의 잣대를 대 그것이 미국 문화니 한국 문화니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음악이라는 공유 지대를 통해 모든 게 혼재된 것이 싸이의 본질적 힘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정성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이 ‘국가적 망신’으로까지 비화하는 건 과도하다. 세계적 열풍으로 ‘국민 가수’라고 추대될 때, 왜 싸이가 자신을 굳이 ‘국제 가수’라고 이름 붙였는가를 떠올려보라. 코즈모폴리턴 싸이는 국가대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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