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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직 안정적 밥벌이로 이용 말고
정치하고 싶다면 교수직 내려놔야 현행 공직선거법상 공무원, 교사, 언론인은 출마시 선거일 90일 전까지 사직이 의무화되어 있다. 반면 교수는 정당법에 따라 정당 발기인 및 당원이 될 수 있어 사직의 의무가 없고, 국회법에 따라 임기 중 휴직을 보장받을 수 있다. 제19대 총선에서도 15명의 현직 교수가 당선됐으며, 18대 때 등원해 휴직 상태로 재선된 이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늘어난다. 당선되면 휴직하고, 낙선하면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 보니 선거 때만 되면 폴리페서 문제가 터져 나온다. 최근 체육회장 선거를 앞두고 용인대 교수직을 내놓은 새누리당 비례대표 이에리사 의원은 체육회장 선거에서 상대가 소속 대학 총장이어서 사퇴한 경우이고, 개원을 앞두고 교수직에서 사직한 경우는 박혜자 민주통합당 의원이 유일할 정도다. 대부분의 교수 출신 의원들은 교수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12년 동안 휴직 상태로 3선을 한 의원도 있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선출직 이외에도 정부 내각이나 청와대 인선에서도 교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요 공직에 진출하는 교수들은 대선 캠프에 참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선 캠프가 정무직 공무원 진출 통로로 활용되다 보니 지난 대선에서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유력 후보의 캠프에 참여한 교수만 하더라도 5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캠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폴리페서 시비가 일자 교수직에서 물러난 이는 이상돈 중앙대 교수를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전문성을 국정에 활용하고,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이런 현실 정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입장엔 동의한다. 또 참정권의 일환으로 교수들의 정치참여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천 경쟁에 뛰어들고, 선거에 출마하고, 캠프에 참여하다 보면 당연히 잦은 휴강이나 강사를 통한 대체강의, 이른 종강, 심한 경우 폐강 등으로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 참여와 교수라는 지위 둘 다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양다리 걸치기에 불과하다. 교육자로서 또 공직을 맡고자 하는 자로서 비양심적이며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수업권 침해를 넘어 그 교육적 폐해는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폴리페서 문제는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늘어나는 점을 보더라도 교수 개개인의 윤리와 양심, 대학 자체 규정에만 맡기기보다는 최소한의 법적 규제를 둘 필요가 있다. 미국은 선출직에 진출할 때 휴직 기간이 2년 이상이면 사직을 해야 하고, 사직한 교수가 강단으로 복귀할 때는 엄격한 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일본 역시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에 나설 때는 교수직을 내놓는 것이 관례이며, 휴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리도 교수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정무직 공무원에 임명되면 사직하게끔 하는 이른바 ‘폴리페서 금지법’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이와 함께 대선 캠프에 참여한 교수들에 대해선 휴직하도록 하고, 같은 사유로 2회 휴직할 경우 사직을 의무화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한 조처는 정치에 참여하는 교수 스스로에게도 폴리페서라는 오명 대신, 당당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전문연구원
지식인의 사회참여 순기능 커 정책 생산과정서 전문성 반영되고
학생들에게도 교수 현장경험이 도움
폴리페서 부정적으로만 봐선 안 돼 대학생 포털 ‘캠퍼스라이프’가 지난해 10월 실시한 설문 결과를 보면, 폴리페서에 대해 ‘찬성한다’(43.5%)는 의견보다 ‘반대한다’(55.9%)는 의견이 우세했다. 폴리페서의 강단 복귀에 대해서도 찬성(43.1%)보다 반대(55.9%)가 앞섰다. 이러한 결과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사회에서 다수의견은 소수의견을 수렴하여 종합할 필요도 있다. 강단 복귀를 찬성하는 응답자들의 주된 찬성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장에서 배우고 느낀 내용이 학생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고,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교수의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며, 정책 생산 과정에서 교수들의 전문성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다 그렇듯이, 폴리페서를 바라보는 시각도 극단에 빠지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우선 폴리페서란 용어가 적절한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언론매체가 폴리페서란 말을 사용할 때는 대체로 교육과 연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교수직을 발판으로 입신양명을 꿈꾸는 행태를 보이는 사이비 교수 겸 유사 정치꾼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폴리페서의 개념이 이런 것을 지칭한다면 폴리페서는 비판받아야 하고, 퇴출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학문적 양심을 사회적 실천에 옮기려는 교수들을 모두 부정적 의미의 폴리페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학과 교수들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놓고 ‘순수한 학문탐구’와 ‘현실참여와 봉사’라는 두 노선의 긴장 속에서 어느 한쪽만을 취하지 않고 양쪽을 균형 있게 취하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경희대학교만 보더라도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지구사회봉사단’을 설립하여 학문과 교육이 사회적 실천과 연계되도록 강조하고 있다. 학문과 교육의 사회적 연계는 단순히 교수만의 책무가 아니라 학생과 대학의 책무이기도 하다. 교수들 중에는 대학이나 정치 양쪽 모두에서 함량 미달인 불량품들도 있겠지만, 진정으로 자기 전문성을 사회적 책무와 연결시키는 명품 지성인들도 많다. 따라서 교수가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것을 무조건 폴리페서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나쁜 폴리페서를 퇴출시켜야 하지만 좋은 폴리페서까지 몰아내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좋은 정책을 만들어 공화국 시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대한민국의 오래된 꿈이자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에 교수와 학생, 대학이 참여하는 일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존경받을 일이다. 교수들이 현실정치와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해서 만들어 내는 공공재의 가치는 크다. 전문적인 정책 생산을 할 수도 있고, 관료주의를 견제할 수도 있고, 국정운영과 행정의 경험을 대학에 돌아와 학생들에게 교육할 수도 있다. 물론 교수의 공공성 창출과 선순환 과정이 항상 성공하지 않고 실패할 위험도 있어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 하지만 교수들의 성공적인 공공재 창출과 성과를 함께 나누기 위해 나쁜 폴리페서와 좋은 폴리페서를 구분하는 일,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켜주는 일, 교수들의 공백을 다른 교수를 충원하여 보충하는 일 등은 대학과 학생들이 함께 부담하고 분담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교수들의 ‘합리적인 휴직 규정’ 등으로 운영의 묘를 살릴 필요가 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비교정치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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