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인사들이 지난 2월27일 오전 국회에서 통합진보당 입당 및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논쟁]
시민운동가들의 정당 가입이 줄을 잇고 있다.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학영 전 한국와이엠시에이전국연맹 사무총장 등이 민주통합당에 합류한 데 이어, 2월27일에는 박원석 전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안진걸 광우병위험 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 등 시민사회 인사 100여명이 통합진보당에 입당했다. 이를 두고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의견과 공공의 이익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양쪽의 논리를 들어본다.
시민운동의 순수성은 신화일 뿐
시민의 입장에서 공공의 이익
위해 헌신해온 시민운동가의
정치참여는 오히려 바람직…
낙선운동 방식은 재검토 필요
박원순 서울시장을 신호탄으로 많은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이 이번 총선에 출마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논란들은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반대 논리는 시민운동 출신의 정치적 진출이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나는 시민운동의 정치적 순수성이라는 개념이 과거 독재에 맞서 체제 바깥에서 투쟁해야 했던 힘든 역사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본다. 찬찬히 뜯어보면, 순수성 논리는 시민운동을 견제하고 이들의 정치적 개입 혹은 참여에 족쇄를 채우려는 쪽에 의해 반복되면서 강화돼왔다. 그러나 과연, 시민운동을 그토록 높게 평가한다는 정치권력과 보수언론은 그 순수성을 인정해서 시민운동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거버넌스의 파트너로 인정해왔는가? 이런 상황에는 시민운동 스스로도 책임이 있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비판 속에 자신의 정당성을 정치권과의 차별화를 통해 확보해보려는 움직임 역시 순수성의 신화화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시민 사이에도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혹은 ‘정치로부터’ 순수해야 한다는 믿음이 퍼지게 되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시민운동의 큰 미덕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시민운동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정치권에 법조·언론계 출신 인사들이 많이 분포하지만 그것을 문제삼는 이들은 별로 없다. 사실 이런 분야야말로 시민운동보다 훨씬 더 공공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아니던가? 정치란 우리의 공동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시민을 대표해서 결정을 내리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에 헌신해온 시민운동가의 정치참여는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가 출신에도 옥석이 있으나, 이런 이들은 선거 과정에서 시민들의 선택을 통해 걸러질 것이다. 물론, 모든 단체의 정치적 개입이나 진출이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체의 성격과 운동의 목적에 따라 단체별로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수립되고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시민운동 출신 인사의 정치적 진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음의 사항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각 시민단체는 그 특성에 맞춰 구성원의 정치참여에 관한 윤리강령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기 단체 출신이 정치에 진출했을 때 어떻게 관계를 단절하고 단체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둘째, 정치에 참여하는 개인은 이해충돌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부터 당선 이후까지 자신이 배경으로 하는 시민운동을 이용한다든가 특혜를 주지 않도록 관계를 명확히 정리해야 할 것이다. 셋째, 낙선운동 등과 같은 시민운동의 선거참여 방식에 대해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시민단체 구성원이 대거 출마하는 가운데 낙선운동이 자칫 자기 구성원을 위한 선거 개입으로 비치지 않도록 참여 단체의 자격조건, 운동의 투명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들 역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이다. 이들이 정치권에 진출해서 지금까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정치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고은태 중부대 교수·건축학
‘호랑이 굴’ 논리로 옹호될 수 없다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권력 견제·감시가 우선이다
독일 녹색당 사례에서 보듯
운동·제도권 아우를 순 없다
요새 정치권의 초미의 관심은 누가 공천을 받느냐 하는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물론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정치참여 의도가 순수할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자칫 그 순수한 의도를 왜곡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시민단체의 역할은 직접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여당이 아닌 야당에 들어가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당과 야당 모두 제도적 권력이고 따라서 시민단체들이 견제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논리가 나올 수도 있다. 예전에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만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던 말, 그러니까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논리로 이들의 행위를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독일 녹색당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녹색당은 1979년 “한발은 제도권에 한발은 운동권에”라는 취지로 환경운동 단체에서 정당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녹색당은 성공한 제도권 정당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운동단체로는 철저히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도 초반에는 운동과 제도권을 아우르려 했지만 결국 제도권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 제도권화되었다는 말이다. 우리 역시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이는 시민운동가 개인이든 아니면 시민단체든 모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하고자 하는 점은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은 다르다는 점이다. 산업사회의 산물인 사회운동은 노동운동과 같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신사회운동에 속하는 시민운동은 후기산업사회의 산물로 개인 간의 이익 혹은 정치·경제·문화적 권력에 의해 침해당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사회운동은 그 속성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유럽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운동세력이 정당으로 탈바꿈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민운동은 정당이나 사회운동과는 그 속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정당으로 탈바꿈한 경우는 독일의 녹색당과 해적당이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시민운동가가 정당에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는 ‘운동의 포기’ 그리고 ‘제도 권력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지금 시민운동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낙천·낙선 운동이 마치 시민운동단체 출신들의 정치권 진입을 돕기 위한 운동으로 비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역 의원들의 입법에 대한 찬반 전력을 바탕으로 낙천·낙선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입법 활동을 직접 하지 않거나 시민운동단체들과 같은 입장에서 활동을 벌인 이들은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운동의 저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단체가 낙천·낙선에 영향을 미치고 또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직접 선거에 뛰어들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정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러면 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존재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권력은 누가 감시할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은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고은태 중부대 교수·건축학
시민의 입장에서 공공의 이익
위해 헌신해온 시민운동가의
정치참여는 오히려 바람직…
낙선운동 방식은 재검토 필요
박원순 서울시장을 신호탄으로 많은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이 이번 총선에 출마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논란들은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반대 논리는 시민운동 출신의 정치적 진출이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나는 시민운동의 정치적 순수성이라는 개념이 과거 독재에 맞서 체제 바깥에서 투쟁해야 했던 힘든 역사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본다. 찬찬히 뜯어보면, 순수성 논리는 시민운동을 견제하고 이들의 정치적 개입 혹은 참여에 족쇄를 채우려는 쪽에 의해 반복되면서 강화돼왔다. 그러나 과연, 시민운동을 그토록 높게 평가한다는 정치권력과 보수언론은 그 순수성을 인정해서 시민운동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거버넌스의 파트너로 인정해왔는가? 이런 상황에는 시민운동 스스로도 책임이 있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비판 속에 자신의 정당성을 정치권과의 차별화를 통해 확보해보려는 움직임 역시 순수성의 신화화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시민 사이에도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혹은 ‘정치로부터’ 순수해야 한다는 믿음이 퍼지게 되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시민운동의 큰 미덕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시민운동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정치권에 법조·언론계 출신 인사들이 많이 분포하지만 그것을 문제삼는 이들은 별로 없다. 사실 이런 분야야말로 시민운동보다 훨씬 더 공공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아니던가? 정치란 우리의 공동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시민을 대표해서 결정을 내리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에 헌신해온 시민운동가의 정치참여는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가 출신에도 옥석이 있으나, 이런 이들은 선거 과정에서 시민들의 선택을 통해 걸러질 것이다. 물론, 모든 단체의 정치적 개입이나 진출이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체의 성격과 운동의 목적에 따라 단체별로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수립되고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시민운동 출신 인사의 정치적 진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음의 사항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각 시민단체는 그 특성에 맞춰 구성원의 정치참여에 관한 윤리강령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기 단체 출신이 정치에 진출했을 때 어떻게 관계를 단절하고 단체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둘째, 정치에 참여하는 개인은 이해충돌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부터 당선 이후까지 자신이 배경으로 하는 시민운동을 이용한다든가 특혜를 주지 않도록 관계를 명확히 정리해야 할 것이다. 셋째, 낙선운동 등과 같은 시민운동의 선거참여 방식에 대해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시민단체 구성원이 대거 출마하는 가운데 낙선운동이 자칫 자기 구성원을 위한 선거 개입으로 비치지 않도록 참여 단체의 자격조건, 운동의 투명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들 역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이다. 이들이 정치권에 진출해서 지금까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정치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고은태 중부대 교수·건축학
‘호랑이 굴’ 논리로 옹호될 수 없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권력 견제·감시가 우선이다
독일 녹색당 사례에서 보듯
운동·제도권 아우를 순 없다
요새 정치권의 초미의 관심은 누가 공천을 받느냐 하는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물론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정치참여 의도가 순수할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자칫 그 순수한 의도를 왜곡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시민단체의 역할은 직접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여당이 아닌 야당에 들어가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당과 야당 모두 제도적 권력이고 따라서 시민단체들이 견제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논리가 나올 수도 있다. 예전에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만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던 말, 그러니까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논리로 이들의 행위를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독일 녹색당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녹색당은 1979년 “한발은 제도권에 한발은 운동권에”라는 취지로 환경운동 단체에서 정당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녹색당은 성공한 제도권 정당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운동단체로는 철저히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도 초반에는 운동과 제도권을 아우르려 했지만 결국 제도권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 제도권화되었다는 말이다. 우리 역시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이는 시민운동가 개인이든 아니면 시민단체든 모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하고자 하는 점은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은 다르다는 점이다. 산업사회의 산물인 사회운동은 노동운동과 같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신사회운동에 속하는 시민운동은 후기산업사회의 산물로 개인 간의 이익 혹은 정치·경제·문화적 권력에 의해 침해당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사회운동은 그 속성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유럽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운동세력이 정당으로 탈바꿈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민운동은 정당이나 사회운동과는 그 속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정당으로 탈바꿈한 경우는 독일의 녹색당과 해적당이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시민운동가가 정당에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는 ‘운동의 포기’ 그리고 ‘제도 권력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지금 시민운동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낙천·낙선 운동이 마치 시민운동단체 출신들의 정치권 진입을 돕기 위한 운동으로 비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역 의원들의 입법에 대한 찬반 전력을 바탕으로 낙천·낙선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입법 활동을 직접 하지 않거나 시민운동단체들과 같은 입장에서 활동을 벌인 이들은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운동의 저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단체가 낙천·낙선에 영향을 미치고 또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직접 선거에 뛰어들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정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러면 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존재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권력은 누가 감시할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은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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