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작가
설 연휴가 끝났다. 누구에겐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었고, 누구에겐 지옥 같은 노동의 시간이었다. 실업 문제로 고통받는 청년들에겐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 자체가 가시방석이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모두들 잘하겠다고, 반성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열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언어만큼 국민의 반응은 뜨겁지 않다. 이번 ‘논쟁’은 각계각층 사람들이 연휴를 보내며 느낀 설 민심을 들어봤다.
가족모임에서 보이지 않는 청춘들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령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나눈다. 1940년에 태어난 이에겐 무척 좋아진 세상이지만 1990년에 태어난 이에겐 가혹한 세상. 20대 청년도 70대 할아버지도 일자리를 찾으려고 취업 사이트를 뒤지거나 일간지를 들춰본다. 중년들은 언제까지 직장에서 버틸 수 있을까 불안해하고, 젊은 직장인들은 제자리인 월급과 치솟는 물가에 속을 태우며 대출금 갚기에 여념이 없다. 부모의 자녀 교육비 고민은 대학생의 등록금 고민으로 이어진다. 모두들 갚고 아끼느라 소비를 줄이는 통에 장사하는 사람들은 돈이 씨가 말랐다며 발을 구른다. 돈이 문제다. 아니, 돈이 없어 문제다. 아무튼 대기업은 지난해에 사상 최대의 현금을 확보하고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도 새해니까, 덕담들을 나눈다. 새해엔 성적도 오르고 월급도 오를 거라고 말한다. 더 열심히 노력하자고 한다. 마치 성적과 월급만 오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하지만 우린 충분히 일하고 벌고 공부하며 산다. 이보다 더 열심일 수 없고 이보다 더 똑똑할 수 없을 만큼. 아닌가? 지금보다 더 혹독하게 일하고 공부하면, 그러면 우리 모두 지금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게 될까?
지금의 돌쟁이가 성인이 되어 있을 무렵, 그러니까 2040년의 설을 상상해본다. 그때에도 빚을 져서 학교에 다니고 집을 마련할까. 우리 땅에서 재배한 곡물과 우리 땅에서 기른 고기로 설상을 차릴 수 있을까. 그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서민층이라 생각하고, 계급이동의 통로는 막혀 있다고 믿으며 ‘1%와 99%’의 구호에 공감할까. 2040년의 설에 내 입에선 어떤 말이 나올까.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말? 혹은,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말?
5년 전, 사람들은 잘살게 되는 것만을 절대 조건으로 삼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부터 살리겠다던 사람에게 많은 표를 던졌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인 올해 설에, 사람들은 밥상 앞에 둘러앉아 어떤 대화를 나누고 무슨 뉴스를 보게 되었나. 이 나라의 정치·사회·경제를 통틀어 우리를 만족시킨 뉴스나 대화거리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건강하라는 말,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누구 뽑을 거냐는 질문, 그리고 아주 낮은 곳에서, 돈 쓰는 게 제일 무섭다는 말이 오간 명절이었다. 그들의 말이 곧 그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 “취직은 했니?”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부모님과 조카에게 내밀 용돈도 없고 차비조차 아까운 청춘들은 가족들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최진영 작가
민생 불안, 여전하다
반값 등록금, 통신비 20% 인하, 생활비 30% 인하, 700만 저신용자 문제 해결. 2007년 대선 공약이다. 말 그대로 빈 공약이다.
설이 지나면 전셋값이 더 오를 것이라고 한다. 지난 10년간 설 이후에 전셋값이 계속 올랐다는 통계까지 들먹이면서 전셋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보도는 집 없는 서민들의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한다. 이 정부는 전셋값이 오른다고 걱정하면서도 전셋집을 공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이상한 정부다. 전셋집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동문서답하듯 집을 사라고만 한다. 우리 국민 99%는 집을 살 여력이 없다. 이미 너무 많은 빚에 허덕이고 있어서 빚을 더 내준다고 해도 그 빚을 갚을 여력이 없다.
공공임대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겠다는 공약은 선거 때마다 반복되었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아이들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 공립 어린이집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줄서기를 해도 차례가 오지 않는다. 치솟는 학원비와 등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학교폭력과 무한경쟁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고, 명문대학 입학을 초·중등교육의 지상과제로 여기면서, 균형 잡힌 인격을 갖춘 민주시민을 키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우리 국민들의 5대 걱정은 교육·주거·일자리·노후·의료 다섯 가지이다.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문제다. 신자유주의 광풍 아래에서 우리 국민들은 각자 열심히 노력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견디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그 결과 전셋값 폭등, 물가 폭등, 가계부채 폭증 등으로 현상유지도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리 국민들 다수가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는 이미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국민 다수의 고민거리는 바로 국가·사회의 과제다.
우리 정치는 국민 다수가 절감하는 민생 불안을 해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육·주거·일자리·노후·의료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전력을 기울여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다.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을 묻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국민을 계속 속일 것이다.
민심은 한결같다. 우리의 삶이 편안하고 존중받기를, 사회지도층에게 엄격하게 법이 집행되기를, 잘못된 정책을 추진한 관료에게 엄격한 책임을 묻기를, 공약을 지키지 못한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기를….
이헌욱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부산에서 본 세대간 표심 차이
부산이 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한나라당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신공항 백지화와 저축은행 사태로 정부·여당에 대해 실망하게 됐다. 권력형 부패 스캔들과 돈봉투 사건은 실망을 불신으로 바꿨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살림살이는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내린 지 오래다.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 야당들은 4월 총선 최대 승부처로 부산을 꼽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민심 변화는 야당이 바라는 대로는 아닌 것 같다. 이곳 ‘기성세대’는 ‘지금까지 그렇게 밀어줬는데 해준 게 뭐가 있나?’고 하면서도 ‘그래도 야당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지지를 거두기는 했으나 대선 주자로는 같은 당 박근혜 의원을 선호하고 있다. 이들의 지역주의도 여전해 보인다. 한나라당이 쇄신에 성공한다면 기성세대의 이런 태도는 더더욱 변치 않을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으로부터의 이탈 조짐은 이곳 ‘젊은 세대’에서 뚜렷이 보인다. 예전에는 부모세대가 이들에게 보수적 신념과 지역주의적 태도를 전수해줬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면서 정치적 태도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지역주의적 성향도 현저히 약해지고 있다. 실업 문제와 등록금 문제로 인한 절망과 비판적 인식도 새로운 매체를 통해 다른 지역의 같은 세대와 공유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야당 후보가 선전한 최근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표출됐다.
그러나 이곳 젊은 세대가 한나라당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됐다고 해서 특정 야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나라당을 대신할 정당을 찾지 못한 채 부동층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총선까지 이어진다면 이들은 투표를 포기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상황도 불변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야당이 이들이 안고 있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투표장으로 향할 수 있게 한다면 선거 결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1930년대 미국 민주당이 보여줬던 모습은 야당한테 좋은 본보기다. 지금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지만 1930년대 이전에는 공화당의 오랜 동지였다. 공화당이 노예제 유지를 원하던 남부 민주당과 전쟁까지 치르면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라는 상황에서 민주당은 ‘복지’와 ‘경제 불평등 해소’라는 약속을 제시했고 뉴딜정책을 통해 이를 실현해나갔다. 위기 앞에서 무기력했던 공화당과는 달랐으며, 이로써 민주당은 절망에 빠져 있던 흑인들을 적에서 친구로 돌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당이 이런 모습을 보여 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전용주 동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진영 작가
이헌욱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전용주 동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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