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선거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이 잦아지고 있다. 박근혜의 ‘비키니’, 문재인의 ‘격파’, ‘고소남’ 강용석 등 최근 예능프로에 출연한 정치인들은 ‘인기검색어’를 만들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뉴스·시사프로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대중은 정치인의 ‘정치’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 열광한다. 이성적 메시지보다는 감성적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긍정론과, 지나친 희화화로 정치 발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부정론이 맞서고 있다. 양쪽의 의견을 들어본다.
소통과 공감의 ‘첫걸음’이기를
그들이 방송에서 나눈 대화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비전을
예능프로에서 확인할 순 없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연이어 예능프로에 출연해서 화제다. 출연 후 누구의 시청률이 높았느니, 왜 그런 것 같다느니 말도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은 2012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두 사람이 한 주 간격으로 예능프로에 출연했으니 전국 시청률이 10%대를 기록하고 수도권 시청률이 1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하다. 주변의 반응도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두 사람 모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 가슴 아파 눈물 흘렸던 경험 그리고 앞으로의 꿈 등에 대해 진솔하게 말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긴장감도 있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여러 현안에 대해 계속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잘 알려진 한 진행자와 박근혜 위원장의 만남이기에 시작 전부터 “누구와 누구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었다. 현 정부와 주요 정치인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문재인 이사장의 언급도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두 사람이 ‘야근혜’, ‘문제일’이라는 별명도 각각 얻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상 첫 예능프로 출연은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이 ‘신비주의 장막’을 걷어내고 사람들에게 한발짝 더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웃고 울었던 시청자들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공감은 기성정치에서 국민들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대변하는 ‘새 정치’의 중요 구성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공감이다. 기성정치가 불통의 정치였다면 새 정치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여야 한다. 이때 공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소통이다. 소통과 공감은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두 사람이 예능프로를 통해 유권자와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소통과 공감을 뛰어넘는 그 어떤 메시지를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일 시간대에 방송되는 여러 예능프로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재미도 있어야 하고, 출연자도 관심을 끄는 사람이어야 한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의 예능 출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박근혜와 문재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 이해와 재미도 주었다. 예능프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들은 성공했다. 그럼에도 예능프로에서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의 상당 부분은 이성적이기보다 대체로 감성적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재미와 감성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 부족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사람들의 ‘가벼운 선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재미와 감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은 그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과 국가운영 철학’의 메시지다. 우리는 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비전과 철학을 예능프로를 통해서 알 수 없다. 비전과 철학을 전하는 것이 예능프로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희망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떤 것이며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우리는 궁금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싶다. 이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나랏일이 감성과 재미, 웃음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능프로 출연보다 더 많이 언론과 만나고 전문가 그룹과 만나고 잠재적 경쟁자들과 만나 토론하며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설명하여 국민적 공감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 정치가 요구하는 소통과 공감을 뛰어넘는 정치의 공공성 회복이 가능하다. 그들의 예능프로 출연이 ‘소통과 공감 그리고 공공성의 정치’를 위한 2012년 대장정의 첫 시작이기 바란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비키니와 격파가 뭐 어때서!
예능프로 아니면 소통 불가능한
한국 정치가 만들어낸 ‘현상’…
대중문화를 ‘쓰레기’ 취급 말라
국민은 정치인보다 합리적이다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있다. 정치를 희화화한다, 이성의 영역이어야 할 정치가 이미지 정치로 흐른다, 정치와 방송이 서로를 선전의 도구, 시청률의 도구로 이용한다 등의 지적 말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도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을 부적절한 것으로 몰아갈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정치인이 개그맨보다 더 웃긴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된 사안이다. 한국 정치가 이성의 영역이었던 적도 없고 이미지 정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정치의 ‘격’과 ‘기준’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제외하면 전지구적으로 합의된 정치적 제도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민주주의조차 20세기 들어 합의한 시대적 현상일 뿐이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정치행태는 그 시대 그 사회를 살아가는 대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은 분석의 대상은 될지언정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뜬구름 잡는 식의 논박보다는 내용에 대한 분석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먼저 박근혜의 비키니 수영복 사진과 문재인의 격파 시범. 왜 하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성차별적 장면이 연출되고 부각됐을까. 또 자신이 저지른 담대한 성희롱을 덮기 위해 사방으로 똥물을 뿌리고 다니다가 최근 한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고소가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개그정치를 넘어 엽기정치를 구사하는 강용석 의원에게 미디어는 과연 무엇일까. 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정치인들은 (강용석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대권주자나 당대표급이다. 혹시 방송사의 ‘접대성 초청’은 아닐까. 한 대권주자의 출연에서 보듯 진행자의 예측가능한 질문과 두루뭉술한 회피성 답변은 그러한 혐의를 제공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청률의 노예’로 전락한 방송사들이 유명 정치인만 부르다 보니 실력 있고 소신 있는 정치(신)인들이 배제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 예능프로가 정치 영역의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상의 한계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이들의 출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이는 저잣거리의 대중문화를 ‘쓰레기’ ‘아편’이라며 한편으로 무시하고 다른 한편 두려워했던 양반·귀족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라면 적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급격한 확산과 젊은 세대의 결집에 놀라 내심 불편해하고 있는 어른들의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예능프로의 인기가 사실은 지리멸렬한 기존 체제로부터 촉발된 반작용이라는 점이다. 위선과 부패로 가득한 정치, 왜곡과 야합의 온상이 된 언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과의 소통보다는 불통을 즐길 뿐 아니라 국가를 사익 추구의 방편으로 삼은 현 정권의 천박함은 국민을 분노와 환멸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한국 정치의 기린아 정봉주와 혁명적 언론인 김어준이고, 이들이 탄생시킨 것이 한국 정치언론의 새로운 프로토타입(원형) ‘나는 꼼수다’이다. ‘나는 꼼수다’와 에스엔에스의 돌풍,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은 기존 언론과 정당에 대한 심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직접소통’이고 정치 예능프로의 출현은 이런 환경변화가 만들어낸 현상일 뿐이다. 다른 한편 이는 정치인과 시청자의 욕구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개성 있는 정치인도 당론에 갇혀 자신을 죽여야 했고 소신을 말할 수 없었다. 방송도 이들을 편가르기 해서 싸움 붙이는 데에만 골몰해왔다. 결국 그들이 대중을 직접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안전한 통로는 바로 예능프로였던 것이다. 우리도 정당이라는 패거리 집단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모습에 편안함과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인과 예능프로의 조합은 시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리고 걱정들 마시라. ‘우매한 대중’이지만 정치인보다는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 문화평론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비전을
예능프로에서 확인할 순 없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연이어 예능프로에 출연해서 화제다. 출연 후 누구의 시청률이 높았느니, 왜 그런 것 같다느니 말도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은 2012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두 사람이 한 주 간격으로 예능프로에 출연했으니 전국 시청률이 10%대를 기록하고 수도권 시청률이 1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하다. 주변의 반응도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두 사람 모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 가슴 아파 눈물 흘렸던 경험 그리고 앞으로의 꿈 등에 대해 진솔하게 말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긴장감도 있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여러 현안에 대해 계속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잘 알려진 한 진행자와 박근혜 위원장의 만남이기에 시작 전부터 “누구와 누구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었다. 현 정부와 주요 정치인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문재인 이사장의 언급도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두 사람이 ‘야근혜’, ‘문제일’이라는 별명도 각각 얻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상 첫 예능프로 출연은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이 ‘신비주의 장막’을 걷어내고 사람들에게 한발짝 더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웃고 울었던 시청자들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공감은 기성정치에서 국민들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대변하는 ‘새 정치’의 중요 구성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공감이다. 기성정치가 불통의 정치였다면 새 정치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여야 한다. 이때 공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소통이다. 소통과 공감은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두 사람이 예능프로를 통해 유권자와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소통과 공감을 뛰어넘는 그 어떤 메시지를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일 시간대에 방송되는 여러 예능프로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재미도 있어야 하고, 출연자도 관심을 끄는 사람이어야 한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의 예능 출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박근혜와 문재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 이해와 재미도 주었다. 예능프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들은 성공했다. 그럼에도 예능프로에서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의 상당 부분은 이성적이기보다 대체로 감성적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재미와 감성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 부족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사람들의 ‘가벼운 선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재미와 감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은 그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과 국가운영 철학’의 메시지다. 우리는 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비전과 철학을 예능프로를 통해서 알 수 없다. 비전과 철학을 전하는 것이 예능프로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희망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떤 것이며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우리는 궁금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싶다. 이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나랏일이 감성과 재미, 웃음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능프로 출연보다 더 많이 언론과 만나고 전문가 그룹과 만나고 잠재적 경쟁자들과 만나 토론하며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설명하여 국민적 공감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 정치가 요구하는 소통과 공감을 뛰어넘는 정치의 공공성 회복이 가능하다. 그들의 예능프로 출연이 ‘소통과 공감 그리고 공공성의 정치’를 위한 2012년 대장정의 첫 시작이기 바란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정희준 동아대 교수 문화평론가
한국 정치가 만들어낸 ‘현상’…
대중문화를 ‘쓰레기’ 취급 말라
국민은 정치인보다 합리적이다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있다. 정치를 희화화한다, 이성의 영역이어야 할 정치가 이미지 정치로 흐른다, 정치와 방송이 서로를 선전의 도구, 시청률의 도구로 이용한다 등의 지적 말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도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을 부적절한 것으로 몰아갈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정치인이 개그맨보다 더 웃긴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된 사안이다. 한국 정치가 이성의 영역이었던 적도 없고 이미지 정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정치의 ‘격’과 ‘기준’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제외하면 전지구적으로 합의된 정치적 제도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민주주의조차 20세기 들어 합의한 시대적 현상일 뿐이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정치행태는 그 시대 그 사회를 살아가는 대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정치인들의 예능프로 출연은 분석의 대상은 될지언정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뜬구름 잡는 식의 논박보다는 내용에 대한 분석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먼저 박근혜의 비키니 수영복 사진과 문재인의 격파 시범. 왜 하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성차별적 장면이 연출되고 부각됐을까. 또 자신이 저지른 담대한 성희롱을 덮기 위해 사방으로 똥물을 뿌리고 다니다가 최근 한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고소가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개그정치를 넘어 엽기정치를 구사하는 강용석 의원에게 미디어는 과연 무엇일까. 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정치인들은 (강용석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대권주자나 당대표급이다. 혹시 방송사의 ‘접대성 초청’은 아닐까. 한 대권주자의 출연에서 보듯 진행자의 예측가능한 질문과 두루뭉술한 회피성 답변은 그러한 혐의를 제공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청률의 노예’로 전락한 방송사들이 유명 정치인만 부르다 보니 실력 있고 소신 있는 정치(신)인들이 배제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 예능프로가 정치 영역의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상의 한계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이들의 출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이는 저잣거리의 대중문화를 ‘쓰레기’ ‘아편’이라며 한편으로 무시하고 다른 한편 두려워했던 양반·귀족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라면 적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급격한 확산과 젊은 세대의 결집에 놀라 내심 불편해하고 있는 어른들의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예능프로의 인기가 사실은 지리멸렬한 기존 체제로부터 촉발된 반작용이라는 점이다. 위선과 부패로 가득한 정치, 왜곡과 야합의 온상이 된 언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과의 소통보다는 불통을 즐길 뿐 아니라 국가를 사익 추구의 방편으로 삼은 현 정권의 천박함은 국민을 분노와 환멸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한국 정치의 기린아 정봉주와 혁명적 언론인 김어준이고, 이들이 탄생시킨 것이 한국 정치언론의 새로운 프로토타입(원형) ‘나는 꼼수다’이다. ‘나는 꼼수다’와 에스엔에스의 돌풍,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은 기존 언론과 정당에 대한 심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직접소통’이고 정치 예능프로의 출현은 이런 환경변화가 만들어낸 현상일 뿐이다. 다른 한편 이는 정치인과 시청자의 욕구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개성 있는 정치인도 당론에 갇혀 자신을 죽여야 했고 소신을 말할 수 없었다. 방송도 이들을 편가르기 해서 싸움 붙이는 데에만 골몰해왔다. 결국 그들이 대중을 직접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안전한 통로는 바로 예능프로였던 것이다. 우리도 정당이라는 패거리 집단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모습에 편안함과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인과 예능프로의 조합은 시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리고 걱정들 마시라. ‘우매한 대중’이지만 정치인보다는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 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