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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쟁

[논쟁] 2012년 ‘사회·문화 열쇳말’

등록 2012-01-03 19:25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해 대중은 뜨거웠다. 한국의 ‘아이돌’들은 아시아, 유럽 등 세계의 젊은이들까지 열광하게 했다. 베테랑 가수들이 경연을 벌이는 <나는 가수다>가 돌풍을 일으켰고 수만명의 청춘들은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몰렸다. 한 편의 영화 <도가니>를 통해 대중의 분노가 솟구쳤는가 하면 기 센 남자 넷이 쏟아내는 직설 <나는 꼼수다>는 전세계 팟캐스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청춘의 고민을 다룬 책들이 날개돋친 듯 팔렸고 스티브 잡스는 신화로 남았다. 새해, 대중의 시선은 어느 곳으로 쏠릴까. 사회·문화 분야 전문가들이 2012년 열쇳말을 꼽아봤다.

‘꼼수’다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 사회에 <나는 꼼수다> 열풍이 불고 있다. 그래서 좀처럼 일상적인 용어로 쓰이지 않았던 말인 ‘꼼수’가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다.

통상적으로 꼼수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방법이나 수단을 의미한다. 정정당당한 방법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정수’와 반대되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꼼수를 쓰거나 꼼수를 부리는 행위는 비열하고 치사한 행위라는 점에서 대단히 부정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꼼수라는 용어는 대중적인 공론의 장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주로 친구들 사이에서나 사용되는 비속어 정도로 여겨졌다.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고, 격한 말싸움에서도 듣기 어려운 말이다.

2011년은 꼼수를 한국의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쇳말로 승격시킨 한 해였다. 그리고 2012년도 꼼수라는 말이 한국의 정치 담론을 지배하는 열쇳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작년과 올해는 가히 ‘꼼수의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꼼수라는 말이 대중의 심리를 드러내는 정치적 언어로 급부상한 것은 무엇보다도 꼼수라는 말이 지난 몇 해 동안 누적된 대중의 정치적 불신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은 기존의 보수 매체가 아니라 대중과의 감성 소통을 강조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인 <나는 꼼수다>였다.

꼼수를 부리는 데 일조한 기존의 보수 언론매체들을 비꼬면서 등장한 대안 매체인 <나는 꼼수다>는 대중의 정치 불신을 대변하면서 일거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부상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사회집단의 다양한 의견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의견 소통을 통해서 조율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국민의 의견은 대의제의 핵심 제도인 의회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민주적 정치 과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의심은 꼼수라는 말을 통해 폭발하였다.

꼼수는 올해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201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멕시코와 함께 오이시디 국가 중에서 제도에 대한 신뢰가 가장 낮은 사회에 속한다(참고로 핀란드 81.59점, 오이시디 평균 56점, 한국 40.57점, 멕시코 38.36점). 민주정치가 회복돼 국민의 여론이 국회와 정부 정책에 제대로 반영돼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바라건대, 임진년에는 꼼수라는 말이 대중의 담론에서 사라지는 정치발전이 이루어지기를!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권경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
권경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나’다

2012년이 ‘정치의 해’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꼼수다> 열풍에 이어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가 2011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만 보더라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주장대로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단어로만 환원하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닥치고 정치’라는 말의 뉘앙스처럼 정치가 ‘종착역’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정치를 통해 실현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삶의 변화이다. 정치는 그 변화를 위한 매개이자 수단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이다. 김어준의 화법을 빌리자면, ‘정치 참여는 곧 나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것’이 된다. 거룩한 희생이나 이타적인 삶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이타적 유전자’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만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결국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말이다. 정치는 곧 ‘나의 문제’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나’를 잃어버렸다. 온라인을 비롯한 가상공간의 얘기만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내 삶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남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모방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혹은 무엇 때문인가. 물음은 점차 선명해졌다. 나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니라 외부의 힘과 권력, 구조에 의해 내 삶이 파괴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 발등의 급한 불만 꺼왔다. 이제 그 불씨가 시작된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행동한다. 분노는 파국이 아니라 혁명과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드는 새로운 힘이다.

외환위기 이후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꿈꿔왔다.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선망했던 경제적 풍요는 다수의 것이 아니라 1%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2008년 경제위기 이후의 깨달음은 올해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2012년은 나의 정치가 시작되는 해이다. 나의 문화,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웃, 동창, 친척, 연예인, 부자, 중산층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이 중요하다. 내가 신나고 행복한 삶. 나의 삶은 곧 우리의 삶이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공부는 왜 하는가, 돈을 어떻게 벌고 있는가. 내게 던지는 질문들은 사회라는 공적 영역과 만나고, 그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바뀌는 혁명의 시작이 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만남. 그 출발은 ‘나로부터’다.

권경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이명석 문화평론가
이명석 문화평론가
‘좀비’다

온 세상이 좀비투성이다. 한때 비(B)급 호러영화에서 비틀거리던 잡것들이 지금 세계의 파티장에서 셔플댄스를 추고 있다. 영화 <새벽의 저주> <28일 후>로 시작된 웰메이드 좀비는 삽시간에 대중문화의 전 영역을 먹어치웠다. 좀비 영화가 한해 30편 이상 쏟아지고 있고, 드라마 <워킹데드>는 미국 케이블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좀비로부터 살아남는 법> <오만과 편견과 좀비> 같은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미국 주간지 <더 위크>는 지난 10년간 ‘좀비 경제’의 가치가 57억4000만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최근에는 한국 문화계가 놀라운 감염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중혁의 <좀비들>,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 등 좀비를 테마로 한 소설과 만화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좀비 소설만 모은 ‘ZA(Zombie Apocalypse) 문학 공모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웃집 좀비> 등 영화계의 움직임도 분주한 가운데, 최근에는 지상파 채널인 <문화방송>까지 <나는 살아 있다>라는 좀비 드라마를 제작·방영했다.

왜 좀비가 이렇게 득세하게 되었을까? <워킹데드>는 말한다. “무기화된 천연두, 에볼라 바이러스… 그런 게 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신종플루, 사스, 구제역 같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다. 소설가 스티븐 킹에게 좀비는 ‘절대 포기를 모르는, 빠르게 움직이는 테러리스트’다. 9·11 사태 이후 만연한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열광에 기반한 자살·폭탄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다. 좀비 게임을 영화화한 <레지던트 이블>에서는 폭력성의 초점이 달라진다. 나를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그들을 죽여 없애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 <아메리칸 좀비>는 좀비를 게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 장애인과 같은 마이너리티로 바라보는데, 한국 작품들도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월가 시위대는 좀비 분장을 한 채 월가 은행이라는 좀비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고 외친다. 동시에 그것은 재정위기를 통해 나락으로 떨어진 미국 중산층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좀비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의 거울이 되고 있다. 좀비는 카드빚에 몰려 거리로 쫓겨난 노숙자들이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학원과 집을 오가다 누군가를 찍어 왕따시키는 아이들이다. 좌빨 촛불시위꾼, 수구꼴통 알바…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집단의 움직임은 좀비의 습격이 된다. 공감을 잃어버린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 좀비, 혹은 좀비를 죽이는 대량학살자.

이명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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