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아쉬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2011년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정치는 혼란했고, 경제는 어려웠다.
사람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보내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회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이번 ‘논쟁’은 송년 특집이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2011년이 아쉬운 이유’를 들어본다.
2012년엔 ‘희망 번데기’들 날 수 있을까
새벽 3시가 되자 기온이 영하 5도를 가리킨다. 꼼지락거리던 침낭 속 움직임도 얼어버린 것일까, 인기척 없이 사라졌다. 비닐 한 장과 침낭 하나로 이 겨울을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희망은 내년으로 일단 또 유보되었다. 습관처럼 유보되는 희망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살아 있다는 것으로 희망이 존재한다 믿어야 하는가. 칼날처럼 새벽바람이 차다.
쌍용차 노동자, 아니 벗들의 잇단 죽음. 올해 나에게 있어 90%는 죽음의 문제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발생한 동료들의 죽음 앞에 정신줄 반은 내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기조차 죄스러웠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쫓겨나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걸 올해 깨달았다. 쫓겨나는 과정에서의 폭력성은 이후 삶을 뒤틀고 관계를 철저히 파괴한다. 더욱이 징벌적 낙인은 올무에 걸린 사슴의 발목마냥 벗어나려 들면 더욱 뼈를 후벼팠다. 그래서 19명의 노동자가 소리소문 없이 죽어간 것이다.
전국엔 많은 ‘희망번데기’들이 이 겨울에 동면이 아닌 동투를 벌이고 있다. 재능교육, 콜트콜텍, 전북고속, 강정마을, 유성기업,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등등. 자기 자리에서 최선의 날갯짓을 준비하는 희망번데기야말로 다가오는 봄의 전령사가 아니던가. 이 희망번데기가 내년 봄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풍요로운 나비가 아니겠는가. 겨울을 나는 이 희망번데기들에게 애정과 용기를 듬뿍 담아 주시라.
새벽이면 영하 5도를 넘나드는 쌍용차 공장 앞에는 오늘도 희망번데기들이 등장한다. 공장 복귀는 물론 쌍용차 회계조작의 실체를 밝히려는 미련한 이들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이 짓을 3년째 하고 있다. 2012년에는 수많은 희망번데기들이 부화에 성공해 높은 하늘로 푸른 들판으로 훨훨 날아다니는 그런 모습을 그려본다. 희망번데기는 2012년 반드시 난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즐기고 좀 삽시다
김어준, 김용민, 정봉주, 주진우의 <나는 꼼수다>를 듣는다. 그런데 정봉주 전 의원이 잡혀갔다. <무한도전>을 매주 토요일에 본다. 그런데 심의 때문에 출연자들이 ‘뻥쟁이’라는 단어 하나 제대로 말 못한다.
1년 동안 프로야구를 봤다. 그런데 돈 없다는 넥센 히어로즈는 선수들을 다른 구단으로 팔아넘기다시피 트레이드하고, 돈 많다는 에스케이 와이번스는 4년 동안 3번 우승시킨 감독을 임기 중에 경질한다. 열 받아서 트위터나 했다. 그런데 트위터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갈 수도 있단다. 선거운동 독려하는 것도 불법이란다.
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오는 야구를 보고 싶었다. 제한 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무한도전>을 보고 싶었다. 트위터에 내 맘대로 글 좀 쓰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생활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즐기는 것들 중 어느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프로야구는 1년에 600만이 관람하고, <무한도전>은 매주 1000만명가량 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응원하는 선수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트레이드 당하지 않게 하고, <무한도전>이 멤버들의 별명을 편하게 부르도록 만들 수 있다.
결정권은 한 명의 구단주, 또는 소수의 심의위원들에게 있다. 그저 야구를 좀 재밌게 보고 싶은데, <무한도전>을 더 재밌게 보고 싶은데, 그러다 트위터에서 수다 좀 떨고 싶은데.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치고, 사람들을 모아도 원하는 야구도, 오락 프로그램도, 인터넷 방송도 보고 들을 수 없었다. 더 건강해지거나, 더 돈을 벌거나 하는 희망은 갖지 않겠다. 즐기던 것을 이상한 이유로 누군가에게 빼앗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투표는 꼭 하겠다. 반드시.
강명석 <텐아시아> 편집장
‘원순씨’ 때문에 ㅠㅠ
2011년 다이어리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토익 900, 자격증 3개, 공모전 3개. 지금 보면 무슨 ‘747 공약’ 같다. 올해 휴학을 하면서 잡았던 목표들이다. 나는 이 목표들 중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박원순 서울시장 때문이다.
올여름, 나는 ‘원순씨’와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50일 내내 등산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원순씨는 그 힘든 등반 중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레기를 주웠고, 나 같은 어린 학생의 이야기도 진지하게 수첩에 메모했다. 어느새 우리들도 수첩을 마련해 글을 쓰고, 쓰레기를 줍는 등 원순씨를 따라 변화하고 있었다.
산행 도중 원순씨의 서울시장 출마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끔 언론에서 종주 중간에 그만두고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원순씨는 우리와의 약속을 지켰다. 모두가 선거를 위해 빨리 내려오라고 난리였으나 우리 다섯명은 백두대간 종주를 끝까지 마치고 하산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박원순 희망캠프의 일원이 되었다. 팬미팅 행사를 준비하고, 플래시몹을 하고, 원순티브이에서 방송을 하고, 광고에 나오고, 합창도 하고, 지지선언을 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렇게 원순씨는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날 밤은 너무 기쁜 날이었다.
선거 이후에도 나는 취업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 청년 정치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며칠 전 ‘청년정치수다’ 행사를 끝냈다. 구룡마을 크리스마스 프로젝트를 기획해 구룡마을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다. 시민통합당 창당대회 때 청년 대표로 발표를 했고,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에서 지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청년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운동을 보여주고 싶었다.
2011년 다이어리의 첫 장에 써놓은 목표는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인과 함께 이렇게 쓰여 있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룹니다.” 2012년, 청년이라는 빗방울은 큰 강물이 될 것이다.
홍명근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4년
개신교인임이 부끄러웠던 한 해
2011년에 큰 별들이 하늘로 가셨다. 이분들이 이 땅에서 당한 모진 고생을 생각할 때 차마 우리가 마음을 더 기대도록 머물러 주십사 부탁할 수 없고 부디 편히 쉬시기만 빌 수밖에 없는 분들이다. 가을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이 하늘의 선녀가 되셨다. 해를 넘기지 못하고 김근태 고문이 세상을 떠나셨다. 시대가 얼마나 엄혹했는지, 고통스러운 자기 몸으로 증거가 되어 살던 분이라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를 시대의 증거로 만든 고문기술자는 왜 하필 목사가 되었는지, 개신교인으로서 괴롭고 부끄럽다. 목사가 된 고문기술자는 생전에 김근태 고문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고문기술자는 언론에 “그때는 고문이 애국이었다… 나의 고문은 예술이었다” 같은 말을 쏟아 놓은 것을 보니 그 용서 빈 것은 지나가다 사람 발 밟고 아이쿠 미안미안, 정도지 회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개신교인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있는 나라의 수장까지도 내곡동 사저 구입 건 등에서 이생의 정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판국에 신기할 것도 없다. 성서에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고 써 있으나 2011년 유독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들의 비통한 자살 소식이 줄을 이었다. ‘소망교회’라는 글자가 출범부터 선명히 새겨져 있었던 이 정권이 과부와 고아를 마구 양산한 셈이다.
올해 돌아가신 아버님은 목사님이셨지만 개척교회라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 전에는 아무도 집안 형편 안 좋은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엠비정부가 출범하자 목사는 잘살겠거니 여기기 시작하더니 정권 막바지에 이르니 엄청나게 잘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그저 씁쓸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호와여, 자기들의 몫을 다 받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것으로 배불리 먹고 그 자녀들도 풍족하게 먹이고 남은 재산을 그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려고 합니다.’ 2011년을 보내며 그저 시편 64편을 읊어 보는 것이다. ‘나’는 ‘우리’로 바꾸면 좋겠지만, 주어는 없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내 집’ 꿈은 언제쯤
20대나 30대가 공감할 수 있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불러내는 <개그콘서트> ‘위대한 유산’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은 어디 갔어?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20대나 30대에게도 내 집 마련의 꿈이 남아 있을까. 솔직히 말해보자. 이루기 위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설렘을 주는 꿈이라는 의미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겨우 일자리를 구했다 하더라도 받은 임금으로 내 집 마련하려면 “숨만 쉬고 살았을 때” 숨만 쉬다 내 집 없이 죽을 수 있다는 진실을 더는 외면하기 어렵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평생 걸려도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부동산 신화가 다소간 사람들의 꿈을 지탱해주는 구실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의 꿈이 사라진 것이 아쉬운 게 아니다.
올해 기대했던 것은 또다른 ‘내 집’ 마련의 꿈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 되게 할 방법 말이다. 작년 가을부터 전월세 대란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임대차 보호 기간이 너무 짧고, 임대료 인상에 제한도 없고, 심지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들은 세입자가 알아서 해결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런 문제가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던져졌고, 정부 여당도 대책을 마련하는 척 부심했고 정치권에서도 한 소리들 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정책 제안들이 나왔다. 임대료의 적정선을 정하자거나 임대료 인상 폭을 제한하자거나, 전월세 전환 이자율을 제한하자거나 하는 등의 제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논의들은 깡그리 사라졌다. 추워지는 겨울,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대책은 부동산을 보유했거나 투자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양도세 중과제도 폐지, 투기과열지구 폐지 등으로 채워졌다. 건설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책도 빠지지 않았다. 발 뻗고 잘 집을 찾아 애면글면하는 세입자들에게는 ‘집을 사라’는 명령만 반복된다. 나가라는 소리 들을까 안절부절못하고 껑충껑충 뛰는 임대료 때문에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처지를 벗어날 다른 방법을 찾는 일, 2012년에도 그대로 이어져야 할 숙제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상식이야말로, 어디 갔어?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강명석 <텐아시아> 편집장
홍명근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4년
김현진 에세이스트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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