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호 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유명인들의 종합편성채널(종편) 출연 논란이 뜨겁다. 공지영 작가가 가수 인순이와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의 종편 출연을 비난하는 트위트를 올린 것이 촉발점이 됐다. 이를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비판하면서 논쟁은 본격화됐다. 현재, 진보 매체에 기고를 해온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종편 출연을 두고 한 유명 트위터 이용자가 “부역”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보수 언론이 주축이 된 종편에 무분별하게 출연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적절치 않다는 비판론과, 종편 자체와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옹호론이 맞서고 있다. 양쪽의 의견을 들어본다.
공인은 사회적 요구에 민감해야
이번 종편 출연 논란의 핵심은
자신의 출연이 지지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2월1일 종편 개국 방송에 안철수, 박원순, 김연아, 박지성 등 많은 공인들이 축하 인사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공지영 작가의 트위터 글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의 종편 축하쇼 참석에 대해 공지영 작가가 “개념없다”, “연아 안녕”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한 논란이다. 여기에 그동안 진보적 입장의 글을 써온 영화칼럼니스트 허지웅이 동아 종편인 <채널에이>의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분개한 트위터 이용자들의 글이 쇄도했다. 또한 독립피디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란 평을 듣던 이성규 피디는 <채널에이>에 ‘오래된 인력거’를 개국특집 다큐로 내보내면서, “‘종편의 부역자가 되다’라는 말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현 지상파의 착취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독립피디들의 수작 다큐는 모두 종편을 향할 것이다. 언론노조를 비롯해 지상파의 그 어떤 진보적 세력도 이러한 불공정 거래와 착취구조에 대해 단 한마디도 공론화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 정치인과 유명 연예인, 그리고 제작자들의 종편 참여를 종편에 대한 확고한 지지로 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일각에서는 공인으로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종편 출연을 용인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은 형평성 차원에서, 연예인과 제작자들은 생계유지 차원에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정치인, 유명 연예인 등 공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추종자와 팬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지지자들은 이들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지위나 출연료로만 자신의 출연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연예인이 출연료 때문에 어떤 곳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한다면, 2004년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프로젝트 파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출연 논란의 핵심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출연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진보 진영의 사람들은 조갑제씨의 종편 출연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반면, 만약에 진중권씨가 종편에 출연한다면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다. 공인은 이미 자신만의 뜻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지자들의 생각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중동 종편은 대리투표, 재투표 등 위헌·위법적인 날치기로 처리된 법률에 근거해 탄생하고, 비정상적인 지분 출자, 황금채널 배정 회유, 의무 전송, 중간광고 허용, 전문의약품의 일반판매 시도 등 정권에 의해 무더기 특혜를 받아온 사실상 ‘불법방송’이다. 이명박 정권 들어 국가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사회적 의제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불법방송의 개국을 축하한다는 것은, 불법적인 조폭 조직의 창립기념식에 참여해 축하 인사를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특정 공인이 이런 종편의 개국쇼나 인터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는 타당한 일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지지자와 팬들에게는 ‘불법’과 ‘특혜’라는 국가 권력에 의한 사회적 부패를 지지하도록 강요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들이 자신의 소신과 무관하게 어떤 입장에 서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은 정치색과는 무관하다며 자신의 행동을 탈색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그것이 원치 않는 정치적 요소를 담고 있더라도) 늘 민감하여야 할 의무가 이들에게는 ‘숙명’처럼 주어져 있다. 공인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종편에 참여한 공인들은 자신의 행동이 온당한 것인가 하는 판단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부패한 사회, 강자독식의 사회, 특권층의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몰아가지 않았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그게 사회가 공인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장지호 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자본 비판과 노동자 비판은 분리해야
채널 휙휙 돌아가는 방송 특성상
몇개 프로로 정체성 세탁 못한다
정수장학회가 지분의 30% 가진
문화방송에도 출연하면 안되나? 몇 달 전 일이다. 알고 지내던 피디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쩐 일이냐 물으니 멋쩍은 목소리로 “종합편성채널로 가게 되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달갑진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는 결이 고운 웃음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던 피디였지만,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싸워 쟁취해 낸 마지막 회 촬영 마지막 쇼트에서, 거짓말처럼 내리기 시작했던 눈을 두고 “하늘이 우리 프로 마지막을 장식해 주고 싶었나 봐요”라고 말하며 쓸쓸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전화기 너머 멋쩍게 웃고 있을 그에게 “좋은 프로 만드셔요. 기대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비단 그뿐이랴. 우리 시대 존경할 만한 많은 작가와 연출가, 예능인과 명사들이 종편채널로 갔다. 노희경 작가는 그가 원하던 <한국방송>에서 편성을 받지 못해 결국 <제이티비시>(중앙 종편)에서 신작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를 선보였고, 일찌감치 완성된 작품인 송지나 작가의 <왓츠업> 또한 이 방송사 저 방송사를 헤매다 <엠비엔>(매일경제 종편)에서 간신히 전파를 탔다.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 이승준 감독의 <신의 아이들>과 같은 수작들은 수년간 계속된 지상파 채널의 철저한 외면에 시달리다 결국 <채널에이>(동아 종편)의 개국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다. 이 웃지 못할, 웃어서는 안 되는 사태의 책임을 그들에게 ‘부역자’ 딱지를 붙여 온전히 그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속이 시원한 거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 시청률의 논리로 무장한 지상파 채널들의 외면과 거절 앞에서 무참히 외로웠을 그들의 고독을 먼저 생각하고자 한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이 있다 해도, 그들이 종편에 참여해 콘텐츠 생산에 기여함으로써 해당 채널의 보수성을 가려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으냐고. 과거 안티조선 운동에 유효하게 작동했던 이 논리는 종편에 참여하는 많은 방송 노동자들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것은, 의외로 ‘그들’의 참여가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해당 채널의 극우·보수성을 가려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방송을 콘텐츠 단위로 소비하지, 채널 단위로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구독신청을 해야 하는 신문과는 달리, 리모컨으로 채널을 휙휙 넘길 수 있는 티브이 채널은 한두 개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그 정체성을 세탁할 수 없다. 생각해 보자. <무한도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이 김재철 사장의 <문화방송>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는가? <해피선데이> ‘1박2일’에 대한 대중의 애정이 김인규 사장의 <한국방송>에 대한 긍정으로 직결되는가? 당장 종편 개국 첫날부터 알 수 있지 않은가.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던 허지웅과 장항준이 <채널에이>의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강호동, (23년 전에) 일본 야쿠자와 밥 먹어’ 따위의 ‘신상 털기’ 기사를 특종이랍시고 내는 <채널에이> 보도국의 몰상식과 무능을 변호해 주진 않는다. <티브이조선>(조선 종편)이 우리 시대 가장 존경할 만한 작가 김수현을 영입해 주말극을 방영한다고 해서, 박근혜 의원에게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낯뜨거운 찬사를 보내는 정치적 편향성이 감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방송사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에 대한 비판과,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은 명확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그걸 헷갈리기 시작하면 전선은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선만큼 복잡해진다. 누군가 유재석에게 “당신은 정수장학회가 지분을 30%나 소유한 <문화방송>에서 프로그램을 두 개나 하고 있으니, 박정희 독재의 정당성을 전파하는 데 부역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런 식의 비판이 정수장학회에 대한 비판에 단 한 톨도 득이 되긴커녕 오히려 해가 될 것이란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짓을 김연아에게, 인순이에게, 허지웅에게 하고 있는 건가. 전술전략적 자멸의 길을 걸어도 좋을 만큼 우리의 전선이 그리 여유로운가? 정말?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자신의 출연이 지지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2월1일 종편 개국 방송에 안철수, 박원순, 김연아, 박지성 등 많은 공인들이 축하 인사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공지영 작가의 트위터 글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의 종편 축하쇼 참석에 대해 공지영 작가가 “개념없다”, “연아 안녕”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한 논란이다. 여기에 그동안 진보적 입장의 글을 써온 영화칼럼니스트 허지웅이 동아 종편인 <채널에이>의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분개한 트위터 이용자들의 글이 쇄도했다. 또한 독립피디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란 평을 듣던 이성규 피디는 <채널에이>에 ‘오래된 인력거’를 개국특집 다큐로 내보내면서, “‘종편의 부역자가 되다’라는 말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현 지상파의 착취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독립피디들의 수작 다큐는 모두 종편을 향할 것이다. 언론노조를 비롯해 지상파의 그 어떤 진보적 세력도 이러한 불공정 거래와 착취구조에 대해 단 한마디도 공론화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 정치인과 유명 연예인, 그리고 제작자들의 종편 참여를 종편에 대한 확고한 지지로 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일각에서는 공인으로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종편 출연을 용인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은 형평성 차원에서, 연예인과 제작자들은 생계유지 차원에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정치인, 유명 연예인 등 공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추종자와 팬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지지자들은 이들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지위나 출연료로만 자신의 출연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연예인이 출연료 때문에 어떤 곳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한다면, 2004년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프로젝트 파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출연 논란의 핵심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출연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진보 진영의 사람들은 조갑제씨의 종편 출연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반면, 만약에 진중권씨가 종편에 출연한다면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다. 공인은 이미 자신만의 뜻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지자들의 생각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중동 종편은 대리투표, 재투표 등 위헌·위법적인 날치기로 처리된 법률에 근거해 탄생하고, 비정상적인 지분 출자, 황금채널 배정 회유, 의무 전송, 중간광고 허용, 전문의약품의 일반판매 시도 등 정권에 의해 무더기 특혜를 받아온 사실상 ‘불법방송’이다. 이명박 정권 들어 국가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사회적 의제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불법방송의 개국을 축하한다는 것은, 불법적인 조폭 조직의 창립기념식에 참여해 축하 인사를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특정 공인이 이런 종편의 개국쇼나 인터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는 타당한 일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지지자와 팬들에게는 ‘불법’과 ‘특혜’라는 국가 권력에 의한 사회적 부패를 지지하도록 강요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들이 자신의 소신과 무관하게 어떤 입장에 서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은 정치색과는 무관하다며 자신의 행동을 탈색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그것이 원치 않는 정치적 요소를 담고 있더라도) 늘 민감하여야 할 의무가 이들에게는 ‘숙명’처럼 주어져 있다. 공인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종편에 참여한 공인들은 자신의 행동이 온당한 것인가 하는 판단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부패한 사회, 강자독식의 사회, 특권층의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몰아가지 않았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그게 사회가 공인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장지호 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몇개 프로로 정체성 세탁 못한다
정수장학회가 지분의 30% 가진
문화방송에도 출연하면 안되나? 몇 달 전 일이다. 알고 지내던 피디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쩐 일이냐 물으니 멋쩍은 목소리로 “종합편성채널로 가게 되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달갑진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는 결이 고운 웃음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던 피디였지만,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싸워 쟁취해 낸 마지막 회 촬영 마지막 쇼트에서, 거짓말처럼 내리기 시작했던 눈을 두고 “하늘이 우리 프로 마지막을 장식해 주고 싶었나 봐요”라고 말하며 쓸쓸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전화기 너머 멋쩍게 웃고 있을 그에게 “좋은 프로 만드셔요. 기대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비단 그뿐이랴. 우리 시대 존경할 만한 많은 작가와 연출가, 예능인과 명사들이 종편채널로 갔다. 노희경 작가는 그가 원하던 <한국방송>에서 편성을 받지 못해 결국 <제이티비시>(중앙 종편)에서 신작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를 선보였고, 일찌감치 완성된 작품인 송지나 작가의 <왓츠업> 또한 이 방송사 저 방송사를 헤매다 <엠비엔>(매일경제 종편)에서 간신히 전파를 탔다.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 이승준 감독의 <신의 아이들>과 같은 수작들은 수년간 계속된 지상파 채널의 철저한 외면에 시달리다 결국 <채널에이>(동아 종편)의 개국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다. 이 웃지 못할, 웃어서는 안 되는 사태의 책임을 그들에게 ‘부역자’ 딱지를 붙여 온전히 그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속이 시원한 거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 시청률의 논리로 무장한 지상파 채널들의 외면과 거절 앞에서 무참히 외로웠을 그들의 고독을 먼저 생각하고자 한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이 있다 해도, 그들이 종편에 참여해 콘텐츠 생산에 기여함으로써 해당 채널의 보수성을 가려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으냐고. 과거 안티조선 운동에 유효하게 작동했던 이 논리는 종편에 참여하는 많은 방송 노동자들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것은, 의외로 ‘그들’의 참여가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해당 채널의 극우·보수성을 가려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방송을 콘텐츠 단위로 소비하지, 채널 단위로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구독신청을 해야 하는 신문과는 달리, 리모컨으로 채널을 휙휙 넘길 수 있는 티브이 채널은 한두 개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그 정체성을 세탁할 수 없다. 생각해 보자. <무한도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이 김재철 사장의 <문화방송>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는가? <해피선데이> ‘1박2일’에 대한 대중의 애정이 김인규 사장의 <한국방송>에 대한 긍정으로 직결되는가? 당장 종편 개국 첫날부터 알 수 있지 않은가.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던 허지웅과 장항준이 <채널에이>의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강호동, (23년 전에) 일본 야쿠자와 밥 먹어’ 따위의 ‘신상 털기’ 기사를 특종이랍시고 내는 <채널에이> 보도국의 몰상식과 무능을 변호해 주진 않는다. <티브이조선>(조선 종편)이 우리 시대 가장 존경할 만한 작가 김수현을 영입해 주말극을 방영한다고 해서, 박근혜 의원에게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낯뜨거운 찬사를 보내는 정치적 편향성이 감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방송사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에 대한 비판과,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은 명확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그걸 헷갈리기 시작하면 전선은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선만큼 복잡해진다. 누군가 유재석에게 “당신은 정수장학회가 지분을 30%나 소유한 <문화방송>에서 프로그램을 두 개나 하고 있으니, 박정희 독재의 정당성을 전파하는 데 부역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런 식의 비판이 정수장학회에 대한 비판에 단 한 톨도 득이 되긴커녕 오히려 해가 될 것이란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짓을 김연아에게, 인순이에게, 허지웅에게 하고 있는 건가. 전술전략적 자멸의 길을 걸어도 좋을 만큼 우리의 전선이 그리 여유로운가? 정말?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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