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저서 <강남좌파>를 펴내면서 “모든 정치인들은 강남좌파”라고 주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용어는 강 교수가 2006년 <인물과 사상>을 통해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처음으로 정의해 공론화했다. 최근에는 조국 서울대 교수가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지려면 강남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강남좌파는 진보의 외연을 넓히는 존재인지, 기득권의 위선에 불과한 것인지 다양한 분석과 견해를 들어본다.
진보의 상징적 효과에 과도하게 의존
강남좌파는 이제 중도좌나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강남좌파’, 이들은 생활은 보수와 비슷하게 하면서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이 균열은 여러 가지로 말썽거리였다. 우선, 그들은 정말 의식은 좌파인데 생활만 우파로 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들의 의식조차 벌써 전통적인 좌파와 다르다. 이들이 자본주의와 돈,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면, 강남좌파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의식과 존재의 불일치라는 관점으로는 그들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은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약자를 돕는 일을 했다. 사실 1987년 중산층 시민들이 민주화의 주축으로 등장한 이후, 그들은 점점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진보의 상징적 가치가 높았던 민주화 과정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좋은 역할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그 말은 점점 말썽거리가 된다. 왜? 과거에는 진보적인 가치를 입에 담기만 해도, 그 제스처를 ‘좋게 사줄 수 있는’ 접점이 많았다. 그러나 점점 그 접점들은 사라졌다.
먼저 강남좌파는 우파와 좌파의 이분법에 의존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이분법에 따르면, 보수가 아니면 거의 자동적으로 ‘진보’였다. 우파든 좌파든 이 전략에 기대왔다. 그러나 보수가 아니면 모두 ‘진보’라고 통칭하는 일은 진보 부풀리기 혹은 진보 인플레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강남좌파는 유럽식으로 말하면 중도좌에 가깝고 미국식으로 말하면 리버럴에 가깝다.(물론 거꾸로 중도는 저절로 강남좌파는 아니다. 중도 가운데는 자신을 진보라고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모호함과 오해를 피하려면, 강남좌파는 중도좌나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보’의 강한 상징적 효과 때문에 강남좌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이제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들은 진보의 상징적 가치와 기득권을 공짜로 혹은 이상하게 누리면서, 동시에 보수와 진보의 경직된 진영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정치가 보수와 진보의 단순한 지형 안에서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기 그치지 않는다. 강남좌파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중도·중도좌 혹은 리버럴의 층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한다. 물론 이 중도와 리버럴은 과거 좌파처럼 정치 영역에서 윤리적 진실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호하고 복잡한 행동의 결이 인정되지 않는 한, 대중민주주의는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중도나 강남좌파는, 내가 최근작 <우충좌돌>에서 설명했듯이, 상당히 모호하고 분열된 생활을 한다. 강남좌파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제 진보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활에서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강남좌파가 생활에서 좌파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열심히 지적·문화적·상징적인 자본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나쁜 짓도 아니며, 쉽게 비난할 일도 아니다. 다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니 ‘좋은 사람은 어쨌든 좌파’라는 상징성에 매달리지 말자. 그 대신에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하는 데 열성이면서도 일정하게 공정성을 추구하는 이 중도 혹은 리버럴의 ‘더러운 존재’를 정치적 실존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자기 자식은 외고나 좋은 대학에 보내면서 말로만 교육의 공공성을 외치는 좌파가 많다면, 강남좌파의 위선을 비판하는 보수의 목소리는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우렁찰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정직과 국가 사랑 등)를 지키지도 못하는 우파가 강남좌파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자신을 무조건 진보·좌파라고 자칭하는 강남좌파가 제 덫을 놓는 점도 있다. 강남좌파는 보수에게만 먹이가 되는 게 아니다. ‘자칭 정통 좌파’에게도 그렇다. 좌파도 아니면서 좌파를 내세우니까. 그러나 중도나 리버럴에 속하면서도 진보의 인플레를 조장하는 강남좌파적 전략도 좋지 않지만, 진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순수’ 좌파적 관점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전자는 진보를 부풀리고, 후자는 진보를 너무 좁힌다. 전자는 공짜로 막 먹으려 하고, 후자는 먹지도 못하면서 으르렁거린다.
이질감 주지만 진보 외연 확장에 기여
엘리트주의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로
‘스타일의 정치’ 넘어서야 지난 학기에 전교생 교양과목으로 ‘진보와 보수’를 열었다. 300명이 넘게 신청한 이 강의에서 빈번히 토론된 주제 중 하나가 ‘강남좌파’다. 온라인 토론에서 한 학생은 “이념이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며, 강남좌파도 좌파의 주류가 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반면 다른 학생은 “요즘 ‘진보’가 세련되고 쿨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식으로 잘못 활용되는데 강남좌파가 그 전형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가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이라면, 다른 하나는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팽팽히 맞섰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강남좌파가 우리 사회 뇌관의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은 이른바 ‘빗장 도시’다.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동시에 소유한 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강남’은 사회적 위세를 상징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이미지와 충돌한다. 보수든 진보든 강남좌파는 일종의 ‘불편함’을 안겨주는 개념이다. 보수에겐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이라 생각했던 강남에서 좌파의 본격적 등장이 반가울 리 없고, 진보에겐 ‘강남’과 ‘좌파’라는 모순적 상징의 충돌이 결국 진보세력을 희화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 점에서 강남좌파는 서구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샴페인 사회주의자’, ‘캐비아 좌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칭찬이라기보다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강남좌파에 대해선 먼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서구 사회 ‘여피 좌파’(yuppie left)의 출현에 대응한다. 여피 좌파는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진보적 성향의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들, 즉 ‘문화 좌파’ 또는 ‘골드칼라 좌파’를 지칭한다. 여피 좌파로 변신한 ‘68세대’는 1990년대 중도좌파의 정치적 기획인 ‘제3의 길’의 주요 지지그룹을 이루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486세대’의 분화를 보여준다.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이 된 일부 486세대는 앞선 산업화세대의 동일한 계층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대세론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이 계층이 젊은 시절 품었던 좌파적 가치를 다시 발견한 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 복지국가 담론에 대한 486세대의 높은 지지는 바로 이를 증거한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한편에서 강남좌파는 민주화를 주도한 노동자나 중간계급에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낯섦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더욱이 노동운동·시민운동에 헌신해온 이들에게 ‘낡은 좌파’라는 이미지를 부과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부 지식인 강남좌파가 오피니언 리더로서 진보적 여론 형성에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고, 특히 젊은 세대와 중산층 안에서 진보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강남좌파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강남좌파를 자임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강남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좌파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자기성찰적 이성’을 더욱 발휘해야 한다. 강남좌파란 말에 담긴 복합적 의미를 고려해 엘리트주의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의 태도가 요구된다. ‘스타일의 정치’를 넘어선, 진보세력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진정성의 정치’를 발휘해야 한다. 둘째, 강남좌파 담론의 등장이 우리 사회 경제·사회 변동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예상되는 부동산 거품의 붕괴, 강화되는 퇴출의 공포, 증가하는 노후생활의 불안 등은 이제 사무직은 물론 전문직까지도 시장과 성장보다는 국가와 분배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를 특징짓는 이러한 변화는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성찰적 연대’를 요구한다. 강남좌파 담론이 단지 소비되는 게 아니라 생산적 논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강남좌파’, 이들은 생활은 보수와 비슷하게 하면서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이 균열은 여러 가지로 말썽거리였다. 우선, 그들은 정말 의식은 좌파인데 생활만 우파로 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들의 의식조차 벌써 전통적인 좌파와 다르다. 이들이 자본주의와 돈,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면, 강남좌파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의식과 존재의 불일치라는 관점으로는 그들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은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약자를 돕는 일을 했다. 사실 1987년 중산층 시민들이 민주화의 주축으로 등장한 이후, 그들은 점점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진보의 상징적 가치가 높았던 민주화 과정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좋은 역할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그 말은 점점 말썽거리가 된다. 왜? 과거에는 진보적인 가치를 입에 담기만 해도, 그 제스처를 ‘좋게 사줄 수 있는’ 접점이 많았다. 그러나 점점 그 접점들은 사라졌다.
먼저 강남좌파는 우파와 좌파의 이분법에 의존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이분법에 따르면, 보수가 아니면 거의 자동적으로 ‘진보’였다. 우파든 좌파든 이 전략에 기대왔다. 그러나 보수가 아니면 모두 ‘진보’라고 통칭하는 일은 진보 부풀리기 혹은 진보 인플레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강남좌파는 유럽식으로 말하면 중도좌에 가깝고 미국식으로 말하면 리버럴에 가깝다.(물론 거꾸로 중도는 저절로 강남좌파는 아니다. 중도 가운데는 자신을 진보라고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모호함과 오해를 피하려면, 강남좌파는 중도좌나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보’의 강한 상징적 효과 때문에 강남좌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이제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들은 진보의 상징적 가치와 기득권을 공짜로 혹은 이상하게 누리면서, 동시에 보수와 진보의 경직된 진영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정치가 보수와 진보의 단순한 지형 안에서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기 그치지 않는다. 강남좌파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중도·중도좌 혹은 리버럴의 층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한다. 물론 이 중도와 리버럴은 과거 좌파처럼 정치 영역에서 윤리적 진실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호하고 복잡한 행동의 결이 인정되지 않는 한, 대중민주주의는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중도나 강남좌파는, 내가 최근작 <우충좌돌>에서 설명했듯이, 상당히 모호하고 분열된 생활을 한다. 강남좌파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제 진보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활에서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강남좌파가 생활에서 좌파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열심히 지적·문화적·상징적인 자본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나쁜 짓도 아니며, 쉽게 비난할 일도 아니다. 다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니 ‘좋은 사람은 어쨌든 좌파’라는 상징성에 매달리지 말자. 그 대신에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하는 데 열성이면서도 일정하게 공정성을 추구하는 이 중도 혹은 리버럴의 ‘더러운 존재’를 정치적 실존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자기 자식은 외고나 좋은 대학에 보내면서 말로만 교육의 공공성을 외치는 좌파가 많다면, 강남좌파의 위선을 비판하는 보수의 목소리는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우렁찰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정직과 국가 사랑 등)를 지키지도 못하는 우파가 강남좌파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자신을 무조건 진보·좌파라고 자칭하는 강남좌파가 제 덫을 놓는 점도 있다. 강남좌파는 보수에게만 먹이가 되는 게 아니다. ‘자칭 정통 좌파’에게도 그렇다. 좌파도 아니면서 좌파를 내세우니까. 그러나 중도나 리버럴에 속하면서도 진보의 인플레를 조장하는 강남좌파적 전략도 좋지 않지만, 진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순수’ 좌파적 관점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전자는 진보를 부풀리고, 후자는 진보를 너무 좁힌다. 전자는 공짜로 막 먹으려 하고, 후자는 먹지도 못하면서 으르렁거린다.
이질감 주지만 진보 외연 확장에 기여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자기비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로
‘스타일의 정치’ 넘어서야 지난 학기에 전교생 교양과목으로 ‘진보와 보수’를 열었다. 300명이 넘게 신청한 이 강의에서 빈번히 토론된 주제 중 하나가 ‘강남좌파’다. 온라인 토론에서 한 학생은 “이념이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며, 강남좌파도 좌파의 주류가 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반면 다른 학생은 “요즘 ‘진보’가 세련되고 쿨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식으로 잘못 활용되는데 강남좌파가 그 전형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가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이라면, 다른 하나는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팽팽히 맞섰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강남좌파가 우리 사회 뇌관의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은 이른바 ‘빗장 도시’다.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동시에 소유한 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강남’은 사회적 위세를 상징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이미지와 충돌한다. 보수든 진보든 강남좌파는 일종의 ‘불편함’을 안겨주는 개념이다. 보수에겐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이라 생각했던 강남에서 좌파의 본격적 등장이 반가울 리 없고, 진보에겐 ‘강남’과 ‘좌파’라는 모순적 상징의 충돌이 결국 진보세력을 희화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 점에서 강남좌파는 서구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샴페인 사회주의자’, ‘캐비아 좌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칭찬이라기보다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강남좌파에 대해선 먼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서구 사회 ‘여피 좌파’(yuppie left)의 출현에 대응한다. 여피 좌파는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진보적 성향의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들, 즉 ‘문화 좌파’ 또는 ‘골드칼라 좌파’를 지칭한다. 여피 좌파로 변신한 ‘68세대’는 1990년대 중도좌파의 정치적 기획인 ‘제3의 길’의 주요 지지그룹을 이루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486세대’의 분화를 보여준다.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이 된 일부 486세대는 앞선 산업화세대의 동일한 계층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대세론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이 계층이 젊은 시절 품었던 좌파적 가치를 다시 발견한 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 복지국가 담론에 대한 486세대의 높은 지지는 바로 이를 증거한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한편에서 강남좌파는 민주화를 주도한 노동자나 중간계급에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낯섦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더욱이 노동운동·시민운동에 헌신해온 이들에게 ‘낡은 좌파’라는 이미지를 부과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부 지식인 강남좌파가 오피니언 리더로서 진보적 여론 형성에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고, 특히 젊은 세대와 중산층 안에서 진보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강남좌파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강남좌파를 자임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강남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좌파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자기성찰적 이성’을 더욱 발휘해야 한다. 강남좌파란 말에 담긴 복합적 의미를 고려해 엘리트주의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의 태도가 요구된다. ‘스타일의 정치’를 넘어선, 진보세력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진정성의 정치’를 발휘해야 한다. 둘째, 강남좌파 담론의 등장이 우리 사회 경제·사회 변동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예상되는 부동산 거품의 붕괴, 강화되는 퇴출의 공포, 증가하는 노후생활의 불안 등은 이제 사무직은 물론 전문직까지도 시장과 성장보다는 국가와 분배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를 특징짓는 이러한 변화는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성찰적 연대’를 요구한다. 강남좌파 담론이 단지 소비되는 게 아니라 생산적 논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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