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한국방송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송>(KBS) 수신료 인상 문제가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22일 여야는 오는 2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전체회의에서 수신료 40%(1000원) 인상 문제를 표결처리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민주당은 “인상을 반대한다”며 태도를 바꿨고, 24일 김진표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한국방송과 여당은 “수신료 현실화”를 외치며 인상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수신료 인상 논란에 대해 한국방송 쪽과 천정배 민주당 의원(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소속),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의견을 들어본다.
수신료 인상, 공정방송의 조건
한국방송(KBS) 수신료가 지난 30년간 월 2500원으로 묶여 있다. 그 기간 물가는 300%, 개인당 소득은 940% 그리고 신문 구독료는 600% 올랐다. 그리고 영국의 수신료는 한국의 9배, 독일은 12배, 일본은 7배가 된다. 하는 수 없이 한국방송은 광고로 그 부족분을 메워 왔다. 이렇게 해서는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고 방송의 질을 높일 수 없다.
한국방송에는 수신료 인상이 필수적이다. 곧 시행될 디지털화로 추가 비용이 불가피하고 난시청 해소에도 돈이 든다. 일본의 재난재해 주관방송사 엔에이치케이(NHK)는 14대의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어 지난 지진 때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는데, 한국의 재난재해 주관방송사인 한국방송은 겨우 한 대의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재난방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교육방송(EBS)을 지원하고 송출을 대신 하는 등 이제까지 감당해 왔던 공적 책무도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30년 만에 1000원을 인상하자는 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40% 인상이라 하지만 큰 액수라 할 수 없고, 1981년 신문 구독료였던 2500원과 같게 책정한 것을 고려하면 그동안 신문 구독료가 여섯 배나 오른 1만5000원인 데 비해서 3500원이 너무 높다 할 수 없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실시한 조사 등 여러 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방송은 우리나라의 매체 가운데 신뢰도와 영향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권력과 기업들이 한국방송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다른 어느 매체보다 한국방송은 더 객관적이고 공정할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언론자유가 확대되고 시민사회가 활발해졌으며 국회의 감시기능도 강해졌으므로 정부의 언론 통제는 과거만큼 심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기업의 영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매체의 운영이 광고에 의존하는 한 어떤 언론도 광고주의 부정을 제대로 보도하거나 비판하지 못한다. 거기다가 광고수입 때문에 시청률에 신경을 써야 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도록 선정적이 되고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방송의 교육적 기능과 사회비판적 기능은 그만큼 희생되고 만다.
광고를 완전히 없애면 가장 좋겠지만 우선 수신료가 1000원이라도 인상되면 시청자들에게 그만큼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만 비로소 공영방송의 힘은 발휘된다는 사실이 이미 방송 선진국에서 입증되지 않았던가?
식인 호랑이에 날개 달아주는 격
이명박 정권은 지난 3년 동안 방송 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에 대통령 자신의 측근들을 사장으로 앉혔고, 한국방송의 경우 정연주 사장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불법으로 해임했다. 조·중·동한테 종편방송을 주기 위해 헌정질서를 유린하면서까지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하기도 했다. 기존 방송을 정권홍보 도구로 전락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조·중·동 종편방송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수신료 인상은 이런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 쿠데타의 연장선에 있다. 물가대란, 전세대란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중산층과 서민의 혈세를 바칠 일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상파 방송은 국민의 알 권리와 민주적 공론 형성에 기여해야 하는 공적 책무를 법률에 의해 부여받고 있다. 방송의 이런 공적 책무는 공영방송, 특히 한국방송과 같은 국가 기간방송에는 더 강하게 적용된다. 국민의 현실을 공정하게 보도하고 사회적 강자들의 월권과 횡포를 감시·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수신료 납부의 정당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국민들은 한국방송을 ‘정권의 나팔수·하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만 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 측근인 김해수씨의 부산저축은행 비리연루 의혹 보도를 막았고, 지난해 12월엔 국민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4대강 사업을 다룬 <추적60분> 방송을 막았다. 어제와 오늘은 항일독립운동을 토벌한 대표적 친일인물인 백선엽씨를 전쟁영웅으로 미화하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공정방송을 요구하는 새노조 조합원 60명을 무더기로 징계위에 회부했다. 국민의 상식과는 멀어도 한참 먼 행태다.
이처럼 한국방송은 정권과 야합해 반칙과 특권 세력의 약점은 숨기고 이들의 논리는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데 앞장서 왔다.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은 무너지고 사회적 감시와 비판은 실종되었다. 이렇게 하고도 국민들에게 수신료를 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게다가 수신료 인상으로 줄어드는 광고는 조·중·동 종편방송을 살리는 먹잇감이 될 것이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2010년 1월 수신료를 인상하면 광고가 한국방송으로부터 민간시장으로 이전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해 이런 사실을 직설적으로 고백했다.
한국방송은 권력의,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방송이어야 한다. 수신료 인상 이전에 한국방송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수신료를 인상하는 것은 위호부익(爲虎傅翼), 식인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관제방송 수신료는 이제 그만
현행 수신료의 법적 성격은 공영방송 사업이라는 특정 공익사업의 경비 조달을 위해 부과하는 특별부담금이다. 방송 수신 대가의 의미로서보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소지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부과한다. 현실적으로는 국민 대부분이 부과 대상이라는 점에서 준조세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기술과 망의 발달, 방송·통신 융합정책 추진 결과 방송 플랫폼도 다변화됐고 방송을 수신하는 단말기도 다양해졌다. 단지 텔레비전 수상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신료를 적용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게 되었다. 텔레비전방송 수신료를 공공서비스방송 수신료로 성격을 바꾸고, 한국방송(KBS) 97%, 교육방송(EBS) 3%로 한국방송에 배타적으로 할당하는 수신료의 산정과 배분 기준도 합리적으로 바꿀 때가 되었다.
시민사회는 수신료 인상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김인규 한국방송 사장이 17개월 전 수신료 인상 의지를 밝혔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랬다. 공영방송의 재원 안정성과 공공서비스 강화를 위해 적정 수신료를 산정하고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당시 1500원 인상안을 추진한 바 있고, 지금도 정당성과 근거만 갖춘다면 모든 요인을 고려하여 현재의 1000원 인상안보다 더 많은 액수도 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 전제는 수신료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묻고 시민사회·정치권과 한국방송이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데 있다.
6월 국회에서 논란이 되는 수신료 1000원 인상안은 이 기본 전제를 갖추지 않았다. 김인규 사장은 독립성 훼손, 제작 자율성 침해 등으로 공영방송을 관제방송으로 바꿔놓았다. 한국방송 이사회는 국민 여론을 방기한 채 인상안을 심의·의결했다. 그리고 방송통신위원회는 조·중·동 방송을 위해 한국방송 2텔레비전 광고 축소 의견을 첨부한 인상안을 합의제를 위반하고 다수결로 처리했다. 인상안이 추진된 17개월 동안 시민은 단 한 번도 수신료 주권자 대접을 받지 못했다.
시민사회는 수신료 인상의 제도 개선 전제조건으로 △수신료위원회 설치 △회계의 투명성 △수신환경 개선 △제작 자율성 확보 △공정성 실현 △시청자위원회 독립 △퍼블릭액세스 개선 △프로그램 저작권 공유 등 여덟 가지를 제시했다. 한국방송이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민주적 제도 개선이 가능한 의제들이다. 마음의 문은 굳게 걸어 닫은 채 시민의 호주머니에서 1000원씩 더 거둬놓고 보자는 식이니 강탈이라는 여론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예의도 염치도 없이 1000원 인상을 겁박하는 한국방송 구노조의 처신을 보아하니 좀비도적떼 방송국이 따로 없어 보인다.
천정배 민주당 국회의원
유영주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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