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농 마을 공동체가 들어설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샘골 일대. 동쪽이 트이고 삼면이 태화산 능선으로 둘러싸여 전쟁이 나도 난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으로 <정감록>에 소개돼 있다.
한겨레21
[특집1] 충남 공주 마곡사의 소농공동체 실험… 절 소유 토지를 사실상 무기한·무상으로 제공해 생태순환형 자립·자치 공동체 시도하는 ‘21세기 사하촌 프로젝트’
그곳에 정녕 마을이 있을까 싶었다. 입구는 길 아래 계곡을 포함해도 폭이 채 30m가 안 됐다. 가늘게 이어진 소롯길을 따라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몇 차례 굽이를 돌자 시야가 트이더니 돌연 분지 형태의 개활지가 펼쳐진다. 전체를 조감하면 동쪽이 트이고 삼면이 산자락에 둘러싸인 부채 형세로, 초입의 굴곡 때문에 바깥에선 내부가 안 보인다. <정감록>이 이곳을 전쟁이 나도 화가 미치지 않는 10곳(십승지) 중 하나로 꼽은 것도 이런 천혜의 지형 때문이다.
땅과 집과 농사 교육이 있는 공동체
“입구는 좁은데, 안쪽은 넓지요? 지세가 여성의 자궁을 닮은 이런 골짜기엔 통상 ‘안골’이란 이름이 붙는데, 이 동네에선 ‘샘골’이라 부르더군요.” 동행한 두레배움터 김석균 교장의 말이다. 지명과 관련해선 샘에서 물이 솟듯 사시사철 골짜기가 마르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서쪽 봉우리인 활인봉 아래엔 약효가 뛰어난 샘이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전쟁기를 전후해 샘골엔 150가구가 넘는 집들이 있었다. 주민 수는 1천 명에 육박했는데, 대부분 정감사상이 유행하던 황해도 출신의 피란민들이었다. 이들은 샘골을 둘러싼 태화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거나 사찰인 마곡사 소유의 전답을 부쳐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1960~80년대를 거치며 하나둘 마을을 등져 지금은 10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사이 10만여 평에 달하던 마곡사 소유 농지들은 소롯길 주변을 제외하곤 잡목 숲으로 변했다.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 휴경지가 6만~7만 평쯤 됩니다. 볕이 잘 들고 경사가 완만한 곳을 골라 밭을 일구고 응달진 산자락에 약초단지를 만들면 충분히 자립 생활이 가능해요. 우선은 10가구 정도로 출발해 점차 규모를 늘려나가야죠.”
김 교장이 샘골에 들어설 소농 공동체의 밑그림을 설명한다. 그가 소속된 두레배움터는 지난 1월3일 마곡사, 전국귀농운동본부와 함께 ‘십승지 소농 마을공동체’ 건설을 위한 3자 협약을 체결했다. 첫 단추를 꿴 것은 2009년 마곡사 주지로 부임한 원혜(58) 스님이었다. 사찰이 가진 주변 땅을 쓸모없이 놀리느니, 귀농인들에게 내놓아 농사를 짓게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발상이었다. 스님은 서울 봉은사 주지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박승옥 전 시민발전 대표에게 의견을 구했다. 두 사람은 마곡사 인근에 생태적인 공동체 마을을 꾸리기로 의기투합했다.
귀농인들이 살 집을 마련하려고 1단계로 마곡사가 운영하던 옛 공민학교 터에 흙집 시공과 교육을 병행하는 두레배움터를 열기로 하고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지난해 4월이었다. 흙집 건축가인 김석균씨가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농사지을 땅과 살 집만 있다고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농인들의 안착을 위해선 지속적인 농사 교육 지원이 절실했다. 전문 교육기관인 귀농운동본부 쪽에도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 즉각 반응이 왔다.
지난해 말 세 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실무 협의를 시작했다. 공동체 운영의 전반적인 틀이 마련됐다. 귀농 희망자들로 ‘마곡사람들’이란 협동조합을 꾸린 뒤 마곡사는 조합에 샘골에 있는 농지와 임야의 경작권을 내놓고, 두레배움터는 조합원 출자금으로 공동 농가주택을 짓고, 귀농본부는 현지에 소농학교를 운영하며 농사기술을 보급하는 3자 협업 방식이었다.
지난해 말 세 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실무 협의를 시작했다. 공동체 운영의 전반적인 틀이 마련됐다. 귀농 희망자들로 ‘마곡사람들’이란 협동조합을 꾸린 뒤 마곡사는 조합에 샘골에 있는 농지와 임야의 경작권을 내놓고, 두레배움터는 조합원 출자금으로 공동 농가주택을 짓고, 귀농본부는 현지에 소농학교를 운영하며 농사기술을 보급하는 3자 협업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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