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309일 85호 크레인에 밥을 올려주며 세상과 이어진 끈이 되었던 황이라씨…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집에 사는 그녀의 마음을 편지로 녹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땅에 내려섰다. 크레인에 올라선 지 309일이 되던 지난 11월10일 오후 3시27분이었다. 같은 시각 <한겨레21>은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환영 인파를 뒤로하고 삐걱거리는 예순두 개의 계단을 올라 중간 난간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가빠진 숨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오르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수직으로 꼭대기에 이르는 통로의 문 앞에 섰다. 309일 전 새벽, 김 위원은 황막한 조선소 겨울바람을 맞으며 쇠톱으로 그 문의 잠금장치를 잘라냈다. 3시간이 걸렸다. 어른 키 높이의 철문은 그렇게 입장을 허락했다. 김진숙 위원은 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김 위원이 떠난 그 문을 열고 기자가 들어섰다. 깜깜했다. 고개를 쳐들었다. 수직으로, 김 위원이 올라간 크레인의 끝이 보였다. 빠끔히 보이는 그곳의 햇살이 올라가는 지점을 알리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곳을 김 위원은 묵묵히 올랐을 것이다. 그 계단을 기자도 올랐다. 문턱까지 수직으로 가파르게 이어진 예순한 개의 사다리 계단을 올라, 그가 머물던 곳에 도착했다. 바람이 차고 셌다. 그 바람에 크레인이 흔들렸다. 환영행사의 노랫소리가 윙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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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간 크레인의 끝이 보였다. 빠끔히 보이는 그곳의 햇살이 올라가는 지점을 알리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곳을 김 위원은 묵묵히 올랐을 것이다. 그 계단을 기자도 올랐다. 문턱까지 수직으로 가파르게 이어진 예순한 개의 사다리 계단을 올라, 그가 머물던 곳에 도착했다. 바람이 차고 셌다. 그 바람에 크레인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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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에 오르며 메모를 남긴 사람
“나 없으면 따뜻하게 지내. 밥 잘 먹고. 평소처럼 많이 웃고.”(김진숙 지도위원이 함께 살던 황이라씨에게 남긴 메모)
두어 달 전 황이라(31)씨는 “김 지도”(황이라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꼭 ‘김 지도’라고 부른다)와 나눈 얘기, 그간 겪은 얘기를 되짚는 글을 <한겨레21>에 전달하기로 돼 있었다. “편지 형식으로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긴박한 상황 탓에 기고는 미뤄졌다. 지난 11월9일, 김 지도위원이 내려오기로 돼 있던 308일째 되던 날, 다시 기고를 요청했지만 김 지도위원이 내려오면 그가 곁에서 지켜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경찰은 돌연 김 위원이 내려오자마자 체포하겠다며 크레인 밑을 에워쌌다. 황씨는 펜을 잡을 여유가 없었다. <한겨레21>은 그의 구술을 편지로 재구성하기로 했다.
트위터의 김여진, 거리의 희망버스, 그리고 크레인에 밥을 올리는 황씨는 한진중공업 노조 조합원들과 함께 김 위원에게 숨을 불어넣은 309일의 생명줄이었다. 김 위원은 내려와 한진중공업 노조원들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김여진씨를 오른쪽에, 황씨를 왼쪽에 세웠고 희망버스에 감사하다는 말을 꺼냈다. 농성 기간 중에 황씨는 김 지도위원의 모든 끼니를 챙겼다. 그뿐만 아니다. 음식, 대·소변, 철을 달리하는 옷가지 등을 밧줄에 달아 올리고 내렸다. 김 위원이 털어놓는 35m 위의 고충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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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도가 크레인에 오르기 5일 전이었죠. 새해 첫날 밤. “우리 보일러 틀고 거실에서 같이 잘래?” 깜짝 놀랐어요. 김 지도에게 무슨 일이 있나 했죠. 함께 산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난방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날 이미 김 지도는 크레인에 오를 생각이었던 것이죠. 미욱한 저는 그냥 “그래요, 좋아요” 하면서 신나했죠. 그날, 그런 나를 보며 김 지도는 무슨 생각을 했나요.
그날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기억나죠? 보일러를 틀었더니 바닥에서 쩍쩍 소리가 나기 시작했죠. 바닥이 터질 듯한 소리에 놀라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처음 입주하고 나서 보일러를 돌리면 그런 소리가 나기는 하는데, 잘은 모르겠다”며 아저씨가 당황해했죠. 우리는 웃었어요. 아저씨 말이 맞았던 것이죠. 보일러를 처음 돌리는 거니까. 그날 그 소리에 잠도 못 잤지요. 그 뒤로 닷새, 다시 우리 집은 냉골이 됐죠.
기자들이 김 지도랑 같이 사는 걸 알고는 꼭 물어보는 게 있어요. “정말 김주익 지회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세상 뜬 뒤로 냉골에서만 자나요?”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웃고 말죠. 저도 믿지 않았으니까. 사람들도 설마 했겠죠. 처음 김 지도의 방에 들어갔을 때 발이 시릴 정도의 냉기가 저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겨울에도 아침마다 찬물로 몸을 씻는 당신에게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싶기도 했어요. 김 지도는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 때문만일까요. 김 지도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것만으로 그런 삶이 가능할까요. 김 지도는 웃기만 합니다. 그때 말랑하고 따뜻한 손으로 전하는 온기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했죠. (황이라씨가 85호 크레인 농성 309일을 정리하며 김 지도위원에게 전하는 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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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며 두 팔을 벌려 환호하는 모습. 뒤로 크레인을 함께 지킨 동료의 모습이 보인다.
스물여섯, 동갑내기 해고자들
황씨는 김 위원이 올라간 그날부터 단 하루도 김 위원의 85호 크레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크레인에서 가까운 노조사무실, 농성장 등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을까. 6월27일. 법원이 김 위원에게 퇴거명령을 내리고 행정대집행이 있었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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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7일, 법원이 퇴거명령을 내리고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비용역을 고용해 노조원들을 끌어냈죠. 그날 저는 85호 크레인 아래 컨테이너 창고에 문을 잠그고 숨었어요. 모두가 잡혀나가는 상황에서 김 지도를 지키겠다고 크레인 중단부에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차렸죠. 저도 거기에 가려고 했고요. 김 지도는 저한테 바깥과 농성장을 이어줄 수 있는 제3의 장소에 있어야 한다고, 붙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그랬죠.
저는 무조건 남아서 밥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김 지도와 약속했으니까. 김 지도가 편하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순간이 밥이 올라가는 그 순간이라고 말했으니까요. 다급하게 숨어들고 보니 창이 없는 컨테이너 창고였어요. 전깃불이 보였지만 불을 켜면 불빛이 새나가 들킬까봐 그 암흑 속에서 숨죽여 하루를 보냈죠. 무슨 낌새를 챘는지 밖에서는 용역들이 들어오려고 문을 부술 듯 두드리고. 그 와중에도 김 지도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6월 말이면 여름인데 왜 그리 추웠는지, 그렇게 무서운 순간에도 왜 그리 배가 고팠는지.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어요. 지부장이라는 말에 문을 열고 보니 바깥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한나절을 그 안에 있었어요. 이틀 만에 인권위원회 덕분에 다시 제가 밥을 올렸죠. 크레인에 밥을 올리고 돌아오는데 “고맙다, 고맙다”는 외침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편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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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집행이 있은 뒤 85호 크레인 위에는 김 위원과 그 아래를 지키는 8명의 노조원이 남았다. 회사 쪽에서 고용한 경비용역 수백 명이 에워쌌고, 전기와 음식 등의 공급을 중단했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나섰다. 최소한의 음식과 물을 넣도록 협상했고, 단 한 사람만 하루 세 번 밧줄에 물품을 달아 올릴 수 있게 통행을 허가했다. 그 한 사람이 황이라씨다. 그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선전부장이다. 김 위원의 동료인 셈이지만 김 위원에게는 그 이상이다. 김 위원과 함께 수년 동안 동거해온 사이이기도 하다. 황씨는 2006년 부산지하철 비정규직 해고자로 김 위원을 만났다. 황씨도, 김 위원도 20년을 걸러 스물여섯 살이라는 같은 나이에 해고자가 됐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가 됐다. 황씨는 김 지도위원을 ‘김 지도’라고 불렀다. 그에게 ‘지도’라는 호칭은 직책의 줄임말이 아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젊은 시절 그를 이끈 ‘맵’(map)이기도 하고, ‘진숙’을 대신하는 애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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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조건 남아서 밥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당신과 약속했으니까. 김 지도가 편하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순간이 밥이 올라가는 그 순간이라고 말했으니까요. 다급하게 숨어들고 보니 창이 없는 컨테이너 창고였어요. 전깃불이 보였지만 불을 켜면 불빛이 새나가 들킬까봐 그 암흑 속에서 숨죽여 하루를 보냈죠.” 황이라씨 구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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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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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오늘도 김 지도를 투사로 영웅으로 받들고, 다른 편에서는 과격한 외부 세력으로 규정짓고 삿대질하는데 김 지도는 웃네요. 그런 김 지도도 크레인 위에서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어요. 맞죠?
올라가고 두 달인가, 100일이 좀 지나서 김주익 지회장이 8년 전 버티다 숨진 기간인 129일이 다가오자 아래에서도 불안해하던 때였죠. 김 지도가 그랬어요. 온통 차갑고 딱딱한 쇠붙이만 손에 닿으니 너무 힘들다고. 온기를 느끼고 싶다고. 그래서 부산 북구 구포시장에서 4만원, 4만5천원을 주고 하얀 잡종 백구 두 마리를 사서 밥이랑 함께 조심스럽게 크레인으로 올렸죠.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김 지도는 두 마리 모두 높은 크레인이 무서워 걸음도 제대로 못 내딛는 걸 보곤 곧바로 내려보냈죠. 그러고는 녀석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종종 물었죠. 한 녀석은 ‘연대’, 한 녀석은 ‘투쟁’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면서 말이에요.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투쟁이는 얼마 안 돼 죽고 말았어요. 마음 아플까봐 말을 못 꺼냈어요. 집에 있는 식물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고 기뻐하고 걱정했던 걸 보면, 투쟁이가 그리 된 걸 알고 있었던 듯도 하네요. 사람들은 알까요, 김 지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투쟁이는 갔지만 연대는 지금도 크레인을 오가며 꼬리를 흔드네요. (편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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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크레인 조종실로 다가갔다. 통로 좌우로 파이프로 이은 난간이 휑하다. 김 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간 직후 했던 ‘다리가 떨려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는 말을 실감했다. 철문에서 열여섯 걸음, 조종실에 앉으니 35m 아래 조선소 바닥이 떠오르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크레인 조종석 발 아래를 작업하기 편리하라고 유리로 만들어서 울렁거림은 증폭 됐다. 아래로 환영행사가 보인다. 김 지도위원이 꽃다발을 들고 황씨를 부둥켜안는다. 1차 희망버스 인파가 금세 크레인으로 뛰어올라 다들 함께 부둥켜안을 것 같다던 김 위원의 말을 이제야 알아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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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오지 말라고 해야겠어. 마음이 너무 되다….”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이 물대포를 맞고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 지도가 한 말이죠. 그러면서도 또 오겠다며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이기도 하고요. 희망버스가 얼마나 고맙고 경이로웠는지. 그 얘기를 하며 우린 많이 웃었죠. 민주노총에서 조직된 사람들만 보다가 역동적이고 자발적인 사람들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다, 놀랍다 그랬죠. “손도 못 흔들어주는데, 왔다고 환영도 못해주는데, 그냥 여기까지 오지 말라고 해야겠어.” 저도 그때 몰려든 전투경찰만 실컷 보고 희망버스 사람들은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그들이 있으니까, 김선우 시인도 김여진씨도 수많은 지지자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버틴 거니까 감사하자, 그랬죠. 감사한 만큼 미안함도 커서 괴롭고 힘들었어요, 그때. (편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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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일 만에 문이 열렸다. 김 지도위원의 표정이 밝다.
“우리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조종실에 걸려 있는 달력은 1월에 멈춰 있고, 조종석 뒤로 이불 한 채가 반으로 접혀서 깔려 있다. 김 위원이 몸을 누이고 비바람을 피한 공간이었다. 아래로 발이 위로는 머리가 닿을 정도다. 좌우로는 양팔을 뻗을 수 없다. 아래 도로에서 큰 트럭이 지날 때 바닥이 울리고, 환영행사 앰프 소리로 크레인 철벽이 울렸다. 309일의 짐을 싸는 데는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베개 하나, 요 두개를 개고, 이불을 챙겼다. 그것만으로도 조종실이 텅 비었다. 마지막으로, 조종석 옆 한 뼘쯤 하는 화초가 자리를 잡았다. ‘호야’였다. 김 위원은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물을 주었던 모양이다. 화분이 물기로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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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네.” 오십이 다 돼 처음 먹어본다는 피자를 신기해했죠. 그런 김 지도를 보며 많이 웃었어요. 나오면 평범하게 살아요. 주말이면 평소처럼 늦잠 자고 일어나서 목욕 바구니를 들고 나가서 때도 벗기고 오고. 같이 걷던 온천천 산보도 하고. 시장도 보고.
다시 청춘이 되어도 그리 살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며, 앞으로는 그리 살지 말자는 말밖에 못하겠지만. 우리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그러면 안 될까요. (편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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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 아래로 통하는 철문 옆으로 스티로폼으로 만든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김 위원이 트위터를 통해 알린 방울토마토, 상추, 딸기를 키운 곳인 듯했다. 단번에 안아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이미 세 알을 수확했다는 방울토마토는 보이지 않았고, 상추도 더 이상 심지 않은 듯했다. 지금은 딸기로 보이는 묘종 흔적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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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일곱에도 해고자로 남아 있는 제가 20년 세월의 무력감과 죄스러움을 눙치기 위해 스물일곱의 신규 해고자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봄이 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내게 저토록 빛나는 청춘이 하루라도 있었다면…. 볼 때마다 꿈꾸게 되는 맑은 영혼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원피스 입고 삼랑진 딸기밭에 가고 싶어요. 적개심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닌, 그 순결한 꿈이 이루어지는 봄이길. 부디 저 고운 영혼들이 꽃보다 먼저 환해지는 봄이길. 봄마저 쟁취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런 봄이 부디 저들의 것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김진숙, <소금꽃 나무>, ‘봄은 모두에게 평등했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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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일 동안 김 지도위원이 지냈던 세상의 끝, 1평 남짓한 공간. 이불 한 채를 다 깔지 못할 정도로 좁다.
봄에는 함께 딸기밭 가기를
김 위원의 글에 등장하는 딸기밭에 가고 싶어 하는 청춘이 바로 황이라씨다. 김 위원은 내년 봄 황씨에게 삼랑진 딸기밭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했다. 309일의 흔적이 곳곳에 밴 계단과 통로, 몸을 잠시 누일 수 있는 공간까지 최소한의 배려만 존재했던 85호 크레인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는 그 속에서 약속대로 살아 내려왔다. 11월11일 현재 김 지도위원은 부산 동아대 병원에 입원해 정밀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옆을 황이라씨가 여전히 지키고 있다. 내년 봄, 그들은 약속대로 딸기밭 산보를 가야 한다. 이제 노조와 회사가 나눈 땅의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
부산=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