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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남자의 약한 본질

등록 2011-07-26 14:13

» 한겨레21 정용일
» 한겨레21 정용일
한겨레21
[표지이야기] 남성성 상징으로 찬양받다 총기사건 이후로 총체적 문제 드러낸 해병대…사적 제재와 복종 문화 개선 권고에 눈 감은 지휘부가 책임져야

“나는 국가전략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선봉군임을 자랑한다!”

먹어야 했다. 저녁밥이 지어진 훈련단 식당 앞에서 ㄱ(33)씨도 800여 명의 다른 동기들과 쉰 목에 다시 힘을 줬다. “하나! 나는 찬란한 해병 정신을 이어받은 무적 해병이다!” 1998년 11월 초 저녁 포항 해병대 훈련단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800여 명의 남자들이 줄 서 있는 식당 앞은 춥지 않았다. “하나! 나는 불가능을 모르는 전천후 해병이다!” 10월8일 훈련단 입구에서 아버지가 든 손이 내려가는 걸 보기 전에 등 돌려 들어온 지 5주째다.

오밤중의 오리걸음은 나중 일

이른바 ‘극기주’다. 정해진 턱걸이를 하지 못하면 밥을 먹지 못한다. “하나! 나는 책임을 완수하는 충성스런 해병이다. 하나! 나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예 해병이다. 하나! 나는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시커멓게 탄 얼굴로 정수리에 손바닥만 한 머리만 남기고 삭발하는 ‘상륙돌격형 두발’을 한 ㄱ씨는 막힘없이 ‘해병의 긍지’를 외우고 식당에 들어갔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사도신경을 저절로 외웠던 것처럼. 밥을 먹는 ㄱ씨에게는 공복을 해소하는 지금이 행복했다. 훈련단에 들어온 뒤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디아이’(드릴 인스트럭터·훈련 교관)가 “병 839기 총 병사 떠나!”를 외치면 밤새 연병장에서 총검술이나, 어깨동무하고 오리걸음을 해야 할 테지만, 어차피 그건 나중 일이다.

ㄱ씨가 백령도에서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2001년 12월 뒤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있다. ‘강해지고 싶다’는 동기가 많다. 그들에게 해병대원은 ‘강하고 남자다운 남자’다. 2005년 보훈교육연구원이 전화면접을 통해 전국 성인남녀 1007명(남성 428명, 여성 5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병대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서도 이런 해병대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조사 대상의 48.5%(488명)가 해병대에 대해 ‘강하고 남자답다’고 답했다. ‘단결력이 있다’(29.7%), ‘최전방에서 싸운다‘(6.5%)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특히 여성 응답자의 51.8%(300명)가 ‘강하고 남자답다’를 해병대 이미지로 꼽았다. 해병대와 육·해·공군 등 타 군과의 비교 질문에 대해 64.4%가 ‘해병대의 전투력과 사기가 가장 높아 보인다’고 답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나 ‘무적 해병’ 등 해병대의 전통적인 슬로건에도 이런 이미지가 담겨 있다.

ㄱ씨에게 해병대의 잇단 총기 난사 및 자살 사건은 충격이다. 그는 사고 뉴스를 보자마자 “포항 1사단은 훈련해서 해병대, 2사단은 맞아서 해병대, 백령도 해병은 외로워서 해병대”라는 ‘금언’을 떠올렸다. ㄱ씨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짚어달라는 질문에는 말을 아꼈다. ㄱ씨의 반응이 당혹스러움에 가깝다면, 줄기차게 군 인권 문제를 제기해온 시민단체, 학자와 군 사망자 유가족들의 반응은 좀더 격렬하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7월14일 성명을 내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책임이 병사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 전반에 걸쳐 있는 악습을 방기한 군 수뇌부에 기인한다”라고 비판했다. 구타·가혹행위 등 인권문제는 해병대 수뇌부가 책임을 나눠질 구조적 문제라는 취지다. “귀신 잡는 해병이 해병 잡는 해병이 되었다”(문화평론가 진중권)는 비난도 나온다. 비판은 ‘해병대 2사단의 문제’라는 제한된 분석부터 일방적으로 찬양받아온 해병대의 신화가 몰락한 것 아니냐는 좀더 적극적인 의견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raquo; 해병대 수색대 대원들이 2007년 강원도 평창군 황병산 일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 해병대 수색대 대원들이 2007년 강원도 평창군 황병산 일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자율’ 해병이 ‘타율’ 해병을 이겼다

‘강한 해병대’의 이미지가 부풀려져 있다는 지적은 2005년 설문에서도 나왔다. 해병대의 ‘부정적 인상’에 대한 질문에 36.1%의 응답자가 ‘실제보다 해병대라는 이미지가 부풀려져 있다’고 했다. 구타·가혹행위에 기반을 둔 병사들 사이의 사적인 제재, 맹목적인 복종 문화가 외려 해병대의 전투력을 감소시킨다는 지적이 학계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연세대 정치학과 최정준씨는 자율성을 강조한 미국 해병대와 복종 문화를 강조한 일본 육전대(해병대에 해당함)가 맞붙은 태평양전쟁을 연구한 뒤, 논문 ‘미국 해병대와 일본 육전대의 조직문화 비교’(2009)를 펴냈다.

논문을 보면, 미국 해병대의 조직문화는 ‘셈페르 피델리스’(Semper Fidelis)로, 일본 육전대의 조직문화는 ‘대화혼’으로 요약된다. 셈페르 피델리스는 수백 년간 유럽의 군대·왕실·명문가에서 사용해온 표어로 ‘항상 충성스럽게’라는 뜻을 지녔다. 논문을 종합하면, 미국 해병대는 개방성·융통성·합리성·자율성 문화를 갖고 있다. “미국 해병대에서는 비록 하급자의 의견이 상급자의 의견과 상이하더라도 상급자는 이를 충분히 검토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뢰관계를 더욱 강화해나가고 있다.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는 예스맨과 같은 무조건적으로 맹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고 최씨는 논문에서 주장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전대의 정신 대화혼은 ‘무사도’로 나타났다. 1882년 일본 천황은 군대에 시달한 ‘군인칙유’에서 “죽음을 기러기의 털보다 더 가볍게 생각하라”고 강요했다. “육전대원들은 천황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존재 이유의 한계점 때문에 항상 내무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자율보다는 타율에 의한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병영 내에서 사적 제재가 만연하였으며 지휘관과 병사들 간에는 상호신뢰에 의한 관계의 형성보다는 엄격한 지휘체계에 의한 명령과 복종의 관계만이 존재하였다”고 최씨는 분석했다.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율이 타율을 이겼다. 일본 육전대는 과달카날에서 밀렸고 이오지마에서 대패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 해병대를 우회 공격하자는 아래로부터의 제언, 이오지마에서 지구전을 펼치자는 의견은 모두 무시당했다. 일본 육전대는 제2차 세계대전 뒤 소멸됐다. 최씨는 “한국 해병대가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조직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씨의 분석이 ‘병영문화의 자율성’을 ‘전투력’이라는 잣대로 평가한 일종의 내재적 분석이라면, 인권단체나 일부 학자의 비판은 근본적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는 왜곡되거나 과도한 남성성에 뿌리가 있으며, ‘강한 남성’의 상징이자 정점인 해병대에서 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해병대 캠프 체험 유행 등 해병대에 대한 일방적 찬양과 신화가 곪아터진 조직문화를 누르고 감춰왔다는 것이다.

군인권센터(소장 임태훈) 등은 지난 7월14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잇단 총기 난사 및 자살 사건의 원인이 구타·가혹행위 등 구조적 악습에 있다며 김관진 국방장관과 유낙준 해병대 사령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해병대의 상습적인 구타·가혹행위를 시정하라고 권고했음에도 아무 실질적인 개선이 없었던 것은 단순히 해병2사단의 문제라거나 문제 사병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는 게 인권단체의 비판 취지다.

군 안팎을 넘나드는 남성연대

여성학자 권인숙씨가 거론한 ‘군사화된 남성적 연대감’은 해병대 조직문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 해당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성적 가혹행위를 당했던 권씨는 <대한민국은 군대다>(청년사)에서 ‘왜곡된 남성성’이 낳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었다. 권씨는 “군대에서 남자다움은 무엇이 남자다움에 포함되고 무엇이 남자답지 않은지를 구분하면서 정의 내려지고 남자답지 않은 것에는 여성스러운 것,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적용 모델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성학자 이동흔씨는 군대에서 “개인의 가치는 남성성의 기준에 의해 판단되며 남성답지 못한 것은 군인답지 못한 것이고 무능한 인간이다. …남성성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남성성을 과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군인권센터의 주장을 종합하면, 해병대에 ‘자정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구타·가혹행위와 병영 생활의 문제점을 알리는 공식 통로인 ‘소원수리’는 고참 병사에 의해 검열받거나 장교들에 의해 종종 무시됐다. 해병대 사령부는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무시했다. 권씨와 이씨의 주장을 종합하면, 구타·가혹행위도 강한 남성이 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경험으로 치부하는 해병대의 왜곡된 ‘남성성 경쟁’이 조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정 능력을 가로막은 것으로 분석된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준비된 지원병으로 구성된 해병대에서 최근 사고가 잇따르는 이유도 ‘왜곡된 남성성 경쟁’이라는 개념틀로 어느 정도 설명된다.

남성성 경쟁의 폐해는 병영 울타리에 멈추지 않는다. 권씨는 저서에서 “군가산점 논쟁에서 남성적 연대감이 남녀 간의 성 구도로 발전된 것은 남성적 연대감의 가장 큰 바탕적 힘이 남자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하면서 오는 연대감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교관들은 여성이나 여성 성기와 관련된 용어와 욕설을 쓴다. “남성 신병은 약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통해 진짜 남성이” 된다. “군대에서 형성된 남성들 간의 연대감과 결속력은 여성성의 비하, 여성성으로부터의 분리와 결별을 전제로 키워져나가는 것”이다. 왜곡된 남성성은 성 불평등 문제를 잉태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인권문제’로 확장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이후 여러 차례 병영문화 개선을 보편적 인권의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군에 주문했다. 군인은 ‘전투력 자원’이 아니라 기본권이 모두 인정되는 ‘제복 입은 시민’이라는 것이다. 2005년 육군 초소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의 지시로 병영문화개선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군인복무기본법 제정, 인권담당관 신설, 자율적 생활 보장 등을 담은 9개 개선 과제와 30개 세부 실천사항을 군대에 제시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그러나 팔각모를 버리지 않았다

ㄱ씨에게 해병대는 애증의 공간이다. “귀에 ○박았냐”는 욕은 재밌었지만, 이등병 시절 선임 앞에서 목을 오른쪽으로 꺾어 맞는 ‘제껴’는 기분 좋지 않았으며, 야간 경계근무 때 여자친구와의 성행위를 선임병에게 세세히 묘사하는 건 “해병대 생활을 잘했”던 그에게도 모욕이었다. 동시에 (입대) 100일 휴가 전날 ‘일병 오장’(일병 가운데 최고참)이 야간 경계근무를 마치고 밤새워 다리미를 붙잡고 몇 시간 남지 않은 수면 시간을 아껴 전투복의 날을 면도날처럼 세우고 철사로 섀미 워커의 털을 한올한올 일으켜 세워주던 장면은 설명할 수 없는 연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갖가지 입장의 비판이 해병대로 쏠린다. 모병제 전환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극히 일부 학자나 운동가들을 제외하고 군대 완전 폐지론자나 해병대 폐지론자는 많지 않다. 해병대 역시 제복 입은 시민이 몸담은 곳이며, 그런 시각이 전투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목소리가 더 많다. “가슴이 아프다”는 ㄱ씨는 예비군 훈련을 다 마쳤다. 그는 아직 팔각모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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