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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본경찰 수사 받는 총련…허종만 자택 압수수색은 몰락의 극적인 상징

등록 2015-05-22 19:34수정 2015-05-24 10:00

2001년 5월25일 개막된 총련 19차 전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배경으로 당시 회장단이 앉아 있다. 중앙이 서만술 제1부의장, 왼쪽 옆이 허종만 책임부의장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1년 5월25일 개막된 총련 19차 전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배경으로 당시 회장단이 앉아 있다. 중앙이 서만술 제1부의장, 왼쪽 옆이 허종만 책임부의장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재외동포들은 정부 광고대로 ‘국가 자산’일까요? 재일한국인의 역사는 조국의 분단 역사와 함께합니다. 기구하고 슬픈 역사입니다. 민족교육을 주도하며 한때 재일한국인 사회를 주도하던 총련이 오래전부터 위기입니다. 정치와 경제 모두 퇴행하는 북한을 옹호하다 젊은 세대에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기사 단신은 총련의 몰락을 보여줍니다. 기사 뒤의 맥락을 짚어봤습니다.

재일한국인 사회는 한국 현대사의 거울이다. 분단된 조국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해왔다. 남북관계의 변화가 재일한국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교토부 경찰 등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는 지난 12일 수입이 금지된 북한산 송이버섯 밀수 사건과 관련 있다는 혐의(외국무역법 위반 등)로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식품회사 ‘조선특산물판매’ 대표이사 김아무개(70)씨와 사원 허아무개(50)씨 등 3명을 체포해 조사중이다. 사원 허씨는 허종만(80) 총련 의장의 차남이다. 앞서 일본 경찰은 밀수 사건과 관련해 지난 3월 허 의장과 남승우 부의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일본 수사기관이 올해로 결성 60년이 된 총련 의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압수수색은 최근 몇 년간 계속된 총련의 몰락 과정을 상징한다.

돈과 건물도 잃고 동포들 신용도 잃고…

위기론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위기의 징후다. 8년 전에 이미 심각한 위기설이 제기됐다. ‘둥지 잃은 총련…숨죽인 재일 조선인- ‘탄압’ 불안감 가득/ “귀화 늘라” 걱정도/ “북에 돈 대느라 무리” 비판 일어’. 2007년 6월20일 <한겨레> 기사 제목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재일코리안에 대한 편견이나 멸시가 조장되지 않을까이다. 언제나 서민이 가장 고생한다. 지금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숨을 죽이고 있다.’ 총련의 상징이던 중앙본부 건물과 토지에 대한 도쿄지방재판소의 가집행선언 판결이 나온 (2007년 6월)19일 배중도 ‘가와사키시교류관’ 관장은 재일동포들이 느끼는 충격과 불안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강철 오사카경제법과대학 객원교수는 <도쿄신문>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은 단순한 금전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재일조선인에게 치명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총련이 주요 시설에서 퇴거하면 민족교육과 자주성의 거점을 잃어버려 동포들 사이에 귀화하는 움직임도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납치 사건은 허용될 수 없지만, 이를 구실로 한 재일동포 탄압 움직임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2007년 총련 중앙본부 건물 매각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55년 만들어진 총련은 한때 수십만명의 회원을 지녔다. 북한이 김정일, 김정은 체제로 이어지는데 반성 없이 북을 추종하다 동포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한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다. 젊은 세대 재일한국인들은 아버지 세대와 다르다. 북한 여권보다 세계 각국을 갈 수 있는 한국 여권을 택하고 있다. 총련 본부 건물 매각은 총련 역사의 뒷장면에 해당한다. 총련 역사의 전성기는 역설적으로 동포들의 힘든 시절에서 시작됐다. 재일한국인들은 2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취업, 사업 등 각종 사회생활에서 차별받았다. 은행 대출도 쉽지 않았다. 1950년대 차별의 실상이 재일한국인 소설가 양석일의 <피와 뼈>에 묘사된다.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된 소설이다. “(당시 일본) 은행은 재일조선인이 론을 취급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피와 뼈>) ‘론’이란 은행이 회사의 외상매출채권을 사서 대신 채무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일본 은행이 재일한국인 사업가의 외상매출채권을 사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비싼 이자를 주고 재일동포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꾸는 장면이 소설에 묘사된다. 취업 때 차별받은 재일한국인들은 사업자금 대출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동포들을 위한 조합이 생겼다. 동포들이 출자해 만들었다. 동포들끼리 빌려주고 갚기로 했다. ‘조은동경신용조합’과 ‘동화신용조합’이 1952년에 설립됐다. 이후 일본 각 지역에서 ‘조은’(朝銀)이라는 이름을 단 신용조합이 생겼다. 가령 ‘조은오사카신용조합’과 같은 명명이다. 이들이 한데 모여 ‘재일본조선신용조합협회’가 만들어졌다. 차별받던 자이니치(남북한 출신을 통틀어 재일한국인을 부르는 일본말)들에게 젖줄이 됐다. 취업과 사업에 차별받아 할 수 없이 파친코(도박) 사업을 많이 하던 재일한국인들이 조은신용조합과 거래를 많이 했다. 법률적으로 북한의 ‘조선은행’이나 총련과 관계없었지만, 인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다 1997년 조은오사카신용조합이 파산했다. 이후 조은도쿄신용조합, 조은야마구치신용조합 등 일본 전국에 걸쳐 있던 여러 조은신용조합이 줄줄이 파산했다. 일본 언론들은 파산 원인으로 세가지를 꼽았다. ‘예금을 북에 송금한 것’, ‘예금을 총련의 정치자금으로 유용한 것’, ‘버블 붕괴’. 전국 각지의 지점이 파산하며 결국 2002년 ‘재일본조선신용조합협회’가 해산했다. 한국의 구제금융 때처럼, 일본 정부도 파산한 금융기관을 정리하는 작업에 나섰다. 파산정리 작업에서 공적자금 1조4천억엔이 조은신용조합에 투입됐다. 일본 국민 세금이 쓰인 것이다.

민족교육 주도하며 60년 구심점
2007년부터 위기론 본격화된 뒤
총련은 막다른 길로 몰렸다
허종만 의장과 부의장 압수수색
허 의장 아들까지 수사선상에

재무 담당하며 승승장구했지만
파친코 직영하며 동포와 경쟁하고
부정확한 회계와 부패 사슬로
허종만 이름이 다시 떠올라
총련 몰락 부추긴 장본인 지목

이 과정에서 총련의 부패와 잘못이 부각됐다. 공적자금을 투입·관리하는 ‘일본 정리회수기구(RCC)’가 “조은신용조합이 대출한 돈 가운데 627억엔이 사실상 총련이 빌린 것”이라며 소송을 걸었다. 승소한 뒤 2012년 7월 총련 본부의 토지·건물에 대해 경매를 신청했다. 몇 차례 유찰 끝에 지난해 한 기업에 낙찰됐다. 총련 쪽은 낙찰 금액이 건물 가치에 비해 적다며 낙찰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일본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지난해 11월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그리고 올해 총련 역사상 최초로 일본 수사기관이 총련 의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일이 벌어졌다. 언론은 납치사건 등과 관련해 악화된 북-일 관계가 판결에 영향을 줬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총련이 무력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돈도 잃고, 건물도 잃었다. 동포들의 신용을 잃은 것이 더 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총련 몰락 과정에 허종만 현 의장이 있다. 그는 2012년부터 총련 의장을 맡았다. 1935년 태생의 허 의장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확한 도일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5년 총련이 결성될 때 가나가와현 위원장을 맡은 이후 총련에서 일해왔다. 총련 중앙본부 국제국 부장을 거쳐 1986년 중앙위원회 재정담당 부의장이 됐다. 같은 해부터 ‘조은신용조합’에 근무하기 시작했고 곧 인사권을 장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모금 능력이 뛰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뢰를 샀다. 조은신용조합의 파산 뒤에 총련이 있다는 의혹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총련 중앙본부 건물도 그의 작품”

한광희 전 총련 중앙본부 재무국 부국장은 회고록 <우리 조선총련의 죄와 벌>(문예춘추·2002)에서 허 의장을 ‘마치 자기 혼자 조직(총련)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했다’고 썼다. 회고록을 보면, 매각된 도쿄의 총련 중앙본부 건물 건설을 진두지휘한 것도 허 의장이었다. 한 전 부국장은 “(중앙본부) 신회관 건설사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당시(1985년) 사무총국 부총무국장이던 허종만이었다. 지금 책임부의장이다. 86년에 신회관이 완성되었을 때, 재정담당부의장에 취임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썼다. “허종만은 총련의 외교부문을 맡는 국제국 출신으로 일본의 정치가들과 왕성하게 교제했다. 처음에는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 그 뒤에는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 훗날에는 자민당의 노나카 히로무와 야마사키 히라쿠, 가토 고이치와 특히 친했다.”

한 전 부국장은 “총련의 부패는 우리가 재무국에 있을 때 시작됐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썼다. 허 의장이 재무를 담당하면서 총련은 최초로 파친코를 직영하기 시작했다. 동포들과 경쟁한 것이다. 한 전 부국장은 잘못된 접대, 부정확한 회계관리 등을 모두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는 1999년 총련을 완전히 떠났다. <마이니치> 등 일본 언론은 허 의장을 철저히 수사하면 일본 정치권의 검은돈 흐름이 드러날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쿄신문>은 ‘총련은 회계감사도 없고, 금전관리가 엉터리’라며 ‘지지자 이탈이 가속화했으나 일부 간부는 본국의 요구에 응하려고 무리를 거듭했다’고 분석했다. <아사히신문>은 ‘그동안 총련의 재정문제를 도맡아온 허종만 부의장 쪽이 중개역을 맡은 부동산업자에게 4억엔을 건네주는 등 깊이 관여하고 있다’며 ‘앞으로 허씨에 대한 비판이 재일동포 사회에서 거세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파산한 조은신용금고 전 이사들 사이에서는 ‘허씨가 조은 문제의 최고책임자’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2007년 6월20일 <한겨레> 기사 뒷부분이다.

8년 뒤 한국과 일본 언론은 다시 익숙한 이름을 보도하고 있다. 한때 자이니치의 구심이던 총련의 위기를 이 남자의 이름이 상징한다.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에 거주하며 사업을 하는 이아무개(39)씨는 “민단이든 총련이든 이곳 재일한국인 사회에서 허 의장 수사 자체가 화제에 오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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