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 강경론 주도
끊임없는 북한 때리기로 정치 입지 굳혀
대북 압박 기조 속 ‘온건화’ 여지도 보여
끊임없는 북한 때리기로 정치 입지 굳혀
대북 압박 기조 속 ‘온건화’ 여지도 보여
[포스트 고이즈미 아베 집중탐구]
지난 2002년 9월17일 낮 역사적인 북-일 정상회담이 열린 평양 백화원영빈관 회담장 옆방. 북한 쪽으로부터 납치 피해자 8명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일본 대표단의 표정은 침통했다.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은 “총서기의 사죄와 설명이 없으면 공동선언 서명은 재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0분 가까이 침묵만 지켰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오후 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사죄를 받아냈다. 회담 소식이 상세히 전해지면서 일본 열도는 격렬한 ‘반북 히스테리’에 휩싸였다. 소장 의원 아베가 총리 후보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5일 북한 미사일 발사 직후 아베는 곧바로 9개항의 대북 제재를 단행했다. 경제제재와 무력행사를 가능케 하는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을 밀어붙이도록 막판까지 독려했다. 중국의 거부권 행사 경고에도 아랑곳않는 초강경 자세에 대한 우려가 잇따랐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베의 지지도는 상승곡선을 그었고,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은 출마를 포기했다. 일본판 ‘북풍’으로 아베는 차기 총리를 굳혔다.
오늘의 아베를 만든 일등공신이 북한이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아베는 끊임없는 ‘북한 때리기’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대북 강경 여론이 그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다. 그에게서 획기적인 대북 정책 전환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치적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대북 압박카드를 남용할 우려 또한 적지 않다.
1988년 납치 문제를 처음 접한 아베는 93년 의원 배지를 단 직후부터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사회당 연립정부 출범 이후 대북 쌀 지원 논의가 한창이던 그 시절, 그는 ‘납치 피해자 구출’을 외롭게 외쳤다. 납치 문제의 효용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은 그의 남다른 정치적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97년 납치 의원연맹을 결성해 피해자 가족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납치는 북한의 국가범죄이며, 최우선 해결과제’라는 인식이 그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아베는 ‘대화와 압력’이 대북 기조이며, 압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정책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의 대북인식도 현실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며,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아베는 ‘제재 무용론’을 일축하면서 ‘북한 옥죄기’에만 몰두해왔다. 그는 “제재가 결정타는 아닐지라도 북한의 화학변화를 끌어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즈미 하지메 시즈오카현립대 교수(국제관계)는 “아베 장관은 ‘리비아 모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리비아 모델은 대량살상무기를 먼저 포기한 뒤, 보상을 받는 방식이다.
대북 관계개선 의지가 뚜렷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공백’도 클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이즈미가 기여한 점으로 △두차례나 방북을 단행할 만큼 북-일 대화에 주도권을 행사했고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신중한 대응을 주문하는 등 제재 분위기 확산에 제동을 걸어왔으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북-미 직접대화를 촉구한 것 등을 꼽았다. 아베에게서 이런 역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다나카 히토시 전 외무성 외무심의관을 필두로 한 일본 정부의 대북 대화파는 이미 축출됐거나 지리멸렬한 상태다.
그렇지만 아베가 총리가 되면 언행과 태도가 좀더 신중하고 균형이 잡힐 것이며, 북한에 냉철하게 접근할 것이라는 일부 기대도 있다. 한 전문가는 “아베 역시 외교 업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정치인”이라며 “상대를 압박하지 않으면 교섭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거친 ‘게이머’이지만, 북한과의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북 제재 발동 뒤 북-일 관계가 냉랭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아베 주변 인사는 북한 쪽과 접촉 채널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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