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당시)가 2017년 8월16일 해군에 인도되기 위해 포츠머스항에 도착한 퀸 엘리자베스호 항모를 배경으로 승무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REUTERS
영국 최신예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호가 이끄는 항모타격단이 5월부터 인도∙태평양 지역 순방에 나섰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이 중국의 부상(굴기)에 맞서 ‘아시아 회귀’를 시작한 것이라는 분석이 적 지 않다. 하지만 유럽 내부에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영국의 이런 행보에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영국이 지구 반대편까지 눈 돌릴 만한 체력이 있느냐는 회의적 시선도 있다.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의 지난 4월 발표 내용과 언론보도를 보면, 퀸 엘리자베스호의 전개 경로는 가히 대영제국의 부활을 알리려는 양 화려하다. 전체 순방 기간만 6개월이고 유럽에서 시작해 40여 개국을 방문한다. 19세기 영국의 세계 전략 최우선 순위였던 인도에 들러 연합훈련을 하고, 한국, 일본 등 미국 동맹국을 찾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도 방문한다. 중국과 주변국이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는 남중국해를 항행하는 것은 물론 대만해협을 통과할지 말지도 저울질하고 있다.
이처럼 퀸 엘리자베스호의 모든 동선의 초점은 ‘중국 견제’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국방부도 “인도∙태평양 지역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 해당 지역에 더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영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번 순방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이에 더해 월리스 장관은 “항모타격단이 순방에 나서면 글로벌 브리튼의 깃발을 휘날리게 된다”면서 “우리의 영향력을 보이고 힘을 암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이 항모를 국제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 이후 40년 만에 처음이라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중국을 타깃으로 세력을 규합하고 이로써 영국 영향력과 힘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국제무대에서 알리고 싶다는 뜻이다.
항모타격단의 근육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17년 취역한 퀸 엘리자베스호는 영국이 가진 두 척의 항모 가운데 하나로 31억파운드(약 4조9천억원)을 들여 건조한 길이 280m의 6만5천t급 디젤 항모다. 항모타격단에는 퀸 엘리자베스호 외에도 구축함 등 함정 6척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 1척, 헬기 14대 등이 동행한다. 퀸 엘리자베스호에는 함재기로 F35B 스텔스 전투기 8기가 실린다. 엘리자베스호의 순방에는 미해군 구축함 '더 설리번스'호가 해병대 F35 10기와 함께 항모타격단에 참여하며, 네덜란드 해군 호위함 ‘에버튼스’도 동행한다. 3국 연합군으로 이뤄진 항모타격단의 구성과 규모, 작전 기간 등으로 볼 때 영국이 퀸 엘리자베스호 순방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의 전략적 팽창은 브렉시트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고, 무엇보다 내부적으로 영국 국민에게 브렉시트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가장 손쉬운 게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이라는 작은 무대를 떠나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겠다는 약속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옛 대영제국의 향수를 자극하며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를 언급하는 이유다.
2021년 3월 공개된 영국 정부의 전략보고서에서도 “영국은 과학과 기술 최강국”이 될 것이며 안보∙외교, 개발, 갈등 해결, 빈곤 감소 등의 영역에서 영국 리더십의 명성을 유지할 것”이라는 장밋빛 구상을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이런저런 구상에 영국의 적극 참여와 주도적 역할을 독려한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연합정상회의 외교관계연구소장인 제레미 샤피로와 선임정책연구원인 닉 위트니는 지난 3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영국이 글로벌 세력으로 재등장할 만한 역량이 되는지 의구심을 표했다. 영국은 70년 만에 최고치인 2조파운드(약 3178조원)의 공공채무를 갖고 있고 빠르게 늘고 있다. 또한 브렉시트로 영국의 대 유럽연합 수출은 2021년 1월 40%나 줄었고, 향후 10년 안에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 감소할 것이라는 다른 연구자들의 조사결과도 제시했다.
장기적으로 영국이 중국 견제를 위한 팽창 전략을 이어갈 경우 경제적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중국의 경제 관계가 상당히 밀접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 독일,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의 네 번째 수입국이다(2019년 기준). 또한 중국은 미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에 이어 영국의 여섯 번째 수출국이다. 영국 2위 철강업체인 브리티시스틸은 중국의 징예그룹이 인수했고, 영국 명문 프로축구단 울버햄튼 원더러스도 중국 자본이 인수했다. 영국 킹스컬리지런던대학 정책연구소와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2018~2019년 영국 거주 중국 유학생은 12만385명으로, 2위인 인도(2만6685), 3위인 미국(2만120)의 5~6배에 이른다. 영국 대학이 중국 유학생들 덕분에 먹고사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경제 역량과 국제 위상을 고려하면 “동아시아 해양 안보와 중국의 군사능력에 대한 우려는 미국의 걱정을 반영하는 것이지, 섬나라 중견국가인 영국의 문제가 아니다”(샤피로와 위트니 연구원)라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영국은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를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미국의 푸들”이라는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과잉 팽창은 과다한 군비지출과 국가채무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제국이 쇠망하는 일반적인 경로였다. 스페인제국이 그랬고, 무엇보다 대영제국이 그러했다. 과거의 향수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할 수 있다.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