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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냄비소리 사라진 양곤의 밤, ‘흑·백 선택’ 내몰리는 시민들

등록 2021-05-07 05:00수정 2021-05-26 17:05

미얀마에서 온 편지 ⑨
군부, ‘폭력중단’ 합의 이틀 만에
‘국익’ 등 조건 내걸며 약속 어겨
지방·국경지역 여전히 거리 시위

경제제재로 공장 문 닫아 20만 실직
시민 사이, 군경 사이 내부갈등 커져
‘회유’에 넘어가면 한쪽에서 ‘적’ 돼
6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열린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이 저항을 뜻하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만달레이/EPA 연합뉴스
6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열린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이 저항을 뜻하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만달레이/EPA 연합뉴스

지난달 중순 8번째 편지를 부친 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달 16일 미얀마 임시정부를 자처하던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는 장관 15명과 차관 5명으로 조직된 국민통합정부(NUG)를 꾸렸습니다. 기존 조직을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인데, 시민들은 꺼져가던 마음 속 희망의 촛불을 다시 밝히게 됐습니다. 24일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이 미얀마 군부 수장을 불러 회담을 했고 사태 해결을 위한 5가지 조항의 합의문을 채택했습니다. 특히 즉각적인 폭력 중단 합의가 높이 평가돼, 유엔(UN)과 국제사회, 한국 언론들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합의 이틀 만에 폭력 중단에 대해 ‘상황 안정’과 ‘국익 부합’이라는 선제 조건을 내걸어 아세안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지금도 군부는 매일 저녁 국영방송을 통해 시위 지도자들의 수배령을 발표하고, 어용 신문사를 통해 국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한 공무원을 회유하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최대 도시 양곤 곳곳에 배치된 군경은 밤낮 없이 시위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있는데, 이제는 사복을 입고 승용차를 탄 체포조까지 등장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양곤의 주택가에서는 2월부터 시작돼 밤 8시면 어김없이 두들기던 저항의 냄비 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냄비 소리가 나면 군경이 그 집 창문을 향해 총을 쏘거나 쇠구슬, 깨진 벽돌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군부는 가정집에도 소등을 강요하고 이를 어기면 군홧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가차 없이 때리고 끌고가기도 합니다. 시민들이 편하게 숨 쉴 수 있었던 보금자리는 과거의 추억이 돼버렸고, 군부를 반대해 자유를 외치던 소리는 목숨을 위협하는 소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방과 국경 지역 시민들은 여전히 군부 쿠데타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은 이전보다 더 조직적인 무장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장단체가 군경의 거점이나 주둔지를 습격하면, 군경은 다음날 선량한 양민을 상대로 보복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은 시민군이 조직돼 대치하는 지역도 생겼다고 합니다.

양곤은 도심에는 차량들이 즐비해, 출퇴근 시간이면 곳곳에 정체구간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은행 입구 현금인출기 앞에 현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수 백 명씩 줄을 서는 광경이 연출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양곤은 거의 일상을 되찾은 듯 합니다. 하지만 그 속은 곪아가고 있습니다. 양곤 대도시 산업단지의 경우, 경제 제재로 인해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2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실직자들의 가족까지 생각하면 극빈 상황에 내몰린 이들은 80만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미얀마 전국적으로는 이번 사태로 인해 국민 100만명 이상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부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군부는 국영 방송을 통해 정국이 안정됐다고 홍보하고, 독립 언론사들은 무장 단체의 승리 소식과 국민통합정부의 활동을 보도합니다. 국민통합정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왕성한 활동과 조만간 국제사회가 자신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갈등은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군경 사이에서도 드러납니다. 도시 곳곳에서 누가 설치한지 알 수 없는 사제 폭탄이 터지고, 지방에서는 일부 군경이 내부 대립해 총격을 가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지방 도시에서는 군부 편에 선 이들이 ‘배반자’로 몰려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합니다.

군부는 ‘학교를 개학하겠다’고 하고, 국민통합정부는 ‘등교 참여는 군부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군부는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한 공무원을 회유·협박하고, 국민통합정부는 군부의 회유에 넘어간 공무원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군부는 반군부 성향 의사들을 체포하고, 국민통합정부는 군부에 반대하지 않은 의사를 ‘군부의 개’라고 표현합니다. 군부와 국민통합정부, 두 정부가 나란히 국민들을 흑·백의 절벽 끝에 세우고 등을 떠미는 형국입니다.

군부와 국민통합정부는 둘 다 민주정부를 자처합니다. 이 두 정권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느 편에 서 있을까요? ‘민주주의는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권력의 전제화를 억제할 수 있는 여러 중요한 정치제도 확립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국가는 어떠한 뜻에서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사전에 등재된 민주주의 국가의 정의입니다. 지금 미얀마 국민들이 지지하는 쪽은 누가 봐도 명백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주권자인 당신이 가는, 그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서 민주화 승리를 위해 마음 속 끝까지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는 진정한 민주 정부의 모습을 기대하긴 어려운 것일까요?

양곤/천기홍 부산외국어대 미얀마어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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