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예비투표에서 차기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확정된 안토니우 구테흐스 전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 AP 연합뉴스
지난해 4월19일, 700여명의 난민을 태우고 리비아를 출발해 이탈리아로 향하던 난민선이 지중해 한가운데서 전복됐다. 불과 1주일 전에도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전복돼 400여명이 숨진 참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난민들이 익사한 이 사건은 지중해 난민 사고 가운데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사고가 발생하고 나흘 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는 “지중해 위기에 대응하는 유럽은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안토니우 구테흐스(67)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의 기고문이 실렸다. “살아남기 위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의 여정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난민은 항상 존재합니다. 어떻게 이들을 인간적으로, 잘 대우할 것이냐의 문제만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난민 위기는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선언하며 서구 사회, 특히 유럽의 적극적 난민 수용을 호소해온 구테흐스 전 대표가 5일(현지시각) 유엔의 차기 새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치러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비공개 예비투표에서 구테흐스는 15개의 상임·비상임 이사국으로부터 찬성을 의미하는 ‘권장’ 13표와 ‘의견 없음’ 2표를 받았다. 안보리는 6일 구테흐스를 사무총장으로 추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최종 투표를 진행한다. 15개 이사국 가운데 9개국 이상이 찬성하고,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없으면 결의안은 통과되는데, 예비투표에서 구테흐스를 반대하는 의미인 ‘비권장’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유엔 총회 193개국의 공식 표결을 거치면, 구테흐스는 오는 12월31일 임기를 마치는 반기문 사무총장에 이어 이듬해 1월 공식 취임한다.
2005~15년 10년여 동안 유엔난민기구의 최고대표를 지낸 구테흐스는 ‘난민 전문가’로 꼽힌다. 구테흐스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 난민 문제에 유엔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구테흐스는 10년 동안 유엔난민기구의 사무국 인원 규모를 약 3분의 2로 줄였고, 이를 통해 남은 인력을 구호 현장에 배치했다. 영국 <가디언>은 “인도주의 구호 현장에서 ‘활동가’로서 활약하겠다고 한 약속”을 구테흐스의 강점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구테흐스는 1949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정치에 뜻을 품었다. 그는 1974년 40년 이상 지속된 군부독재를 반대하며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이후 처음 치러진 총선에서 사회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진입했다. 1992년 당 대표에 오른 그는 1995년 사회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10년간 총리직을 수행했고, 2005년 지방선거에서의 사회당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뒤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로 일했다. 구테흐스는 포르투갈 내부에서 대선 후보에 오르내릴 정도로 입지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지만, 스스로 대권에서 거리를 두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안보리 투표 결과로 유엔 역사상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선출은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사무총장직에 도전한 후보 13명 중 7명이 여성 후보자였을 정도로 여성 사무총장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71년간 쌓여온 공고한 유리천장을 깨진 못했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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